조선왕조실록 기반의 전세(田稅)정책에 관한 연구 : 답험손실법 및 공법(貢法)을 중심으로
초록
과거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부동산 정책 특히 세금 관련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저항이 있었고 더 나아가 국민 분열을 초래하곤 하였다. 과거 조선시대 전세(田稅) 수취방식의 변천과정 분석을 통해 현 시대 조세정책에 대한 시사점을 찾고자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분석결과, 조선시대 토지제도 변화는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었고 백성은 농노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국가재정의 고갈에서 비롯되며, 신진사대부에게의 재분배와 조세제도의 개혁을 통한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수확량에 따라 10%를 최고 세액으로, 손재(損災)에 따라 세액을 감면하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이 시행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부정부패 및 감면 적용의 폐단이 있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의견수렴과 오랜 기간의 논의를 통해 토지등급과 풍흉에 따른 정액세 방식의 공법(貢法)이 제정된다. 이는 당시 사회적, 정치적 환경을 반영한 개혁적 전세(田稅)정책으로 평가된다. 모든 정책의 제정과 결정은 충분한 논의와 숙의 과정이 필요하며, 사회정책적 기능이라는 목적성에 따라 시대가 필요로 하는 방향(세금 강화 또는 완화)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Abstract
Every time the new government was launched, it came up with a number of policies related to real estate taxes, but there was resistance to it and even led to public division. It analyzes the records of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in order to find implications for the current tax policy through analysis of the change of the method of receiving real estate taxes in the past Joseon Dynasty. According to the analysis, the change in the land system during the Joseon Dynasty resulted from the concentration of wealth on the few, the people into serfs, and the depletion of national finance, and was carried out to secure national finance through redistribution to budding forces and reforming the tax system. The Experimental Loss Act will be implemented to reduce the tax amount by 10% according to the yield and the tax amount according to the damage. In the process, however, there were the harmful of corruption and tax reduction. As an alternative to this, a flat-rate tax method will be enacted based on land grades and harvest through long-term discussions and gathering opinions from bureaucrats to the common people. This is regarded as a reformed land tax policy that reflects the social and political environment at the time. The enactment and decision of all policies will require sufficient discussion and deliberation, and it will be necessary to consider the direction of the times (tax strengthening or easing) depending on the purpose of social policy functions.
Keywords: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Land Tax System, Tax Law with Investigating Crop Condition, Flat-rate Tax Act, Right of Collecting Land-Tax키워드:
조선왕조실록, 전세(田稅), 답험손실법, 공법(貢法), 수조권(收租權)Ⅰ. 서 론
1. 연구의 배경
조세 즉 세금은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 목적은 부족연맹 또는 부족국가시대에 외부로부터의 적의 침략을 방어에 필요한 공동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부족 구성원들로부터 일정량의 곡식을 거두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동양의 경우 중국의 당나라에서 조(租)·용(庸)·조(調)방식의 구체적인 세금제도를 확립하였다. 조(租)는 토지의 사용대가로 국가에 내는 부담이며, 용(庸)은 국민이 노동력을 국가에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조(調)는 지역 특산물을 납부하는 것으로 가구당 부과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이런 당의 제도를 도입하였는데 토지에 대한 세금을 조(租)와 세(稅)로 구분하였다. 조(租)는 국가 또는 사전(私田)의 토지경작자가 수확의 일부를 국가 또는 토지 소유자에게 내는 것이고, 세(稅)는 토지의 소유주가 토지경작자로부터 받은 조(租) 중에서 일부를 국가에 내는 것을 말한다(문점식, 2012: 18). 현대적 개념으로는 조(租)는 토지 사용료, 세(稅)는 국가에 내는 세금에 해당한다.
고려말 제정된 과전법에서는 경작자가 부담하는 전조(田租)와 수조권자가 부담하는 전세(田稅)를 구분하였으나, 이후 기록에서는 조와 세를 혼용하여 기록하고 있고 이는 모두 전세(田稅)라는 이름으로 통일되었다. 직전법 시행으로 모든 세금을 국가가 징수하였기 때문에 조(租)와 세(稅)의 구분에 의미가 없어졌다(원윤희, 2019: 57-58).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세금은 조(租)·용(庸)·조(調)방식을 따랐으며 1결당 생산량을 300두로 추정하여 30두를 최고 세액으로 설정하였다. 세액은 수확량의 10%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한편 현대적 개념의 조세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단체가 그의 업무를 수행하는데 소요되는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국민경제에 참여하는 강제ㆍ권력적으로 획득하는 물적 수단 또는 화폐를 말하며,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국민으로부터 징수하는 비보상 강제분담금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 목적 및 기능은 국가재정충당과 정책목적달성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정부 및 지방정부의 재정조달 기능 즉 공공적 경비지출에 충당하기 위한 국고수입 확보를 위한 것이고, 후자는 사회정책적 기능으로 경제활동의 규제·유도, 소득 및 자원 배분, 국민경제의 안정과 성장, 주거안정(지가안정) 및 투기억제 등에 있다(유기현 외, 2021: 143). 결국 세금은 근본적으로 국가 재정 확충을 목적으로 하며, 국가재정을 확충하는 이유는 국가의 정책적 목적 달성에 있다. 정책목적 중 하나는 사회정책 목적 달성으로 공공에 손실을 가져오는 외부불경제에 대한 제한과 공공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외부경제에 대한 유도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최종적으로는 시장실패에 따른 정부의 개입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세금은 국가를 유지하고 운영함에 있어 반드시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저항은 동서양 또는 시대를 막론하고 발생하였다. 조세에 대한 저항은 기본적으로는 탈세(tax evasion)로 나타나며, 고대 그리스와 중국의 진나라 고대문서에서도 탈세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또한 국가의 융성은 세금과 불가분 관계에 있으며, 이는 대영제국의 합리적 조세제도로 국가의 융성이 있었던 반면 징세 청부인의 부정부패로 고대 로마제국의 붕괴를 초래하였고, 귀족이 종교와 특권을 이용한 세금 회피로 국민의 불만이 폭발하였고 이는 프랑스혁명의 원인이 되었다(오무라 오지로, 2019: 6-7). 세계사에서 확인하였듯이 탈세 또는 합리적 세금 회피라 하더라도 이러한 현상이 사회적으로 만연될 때 무장봉기, 혁명, 국가분열은 물론 국가붕괴까지 이르게 된다. 따라서 위정자들은 세금 문제에 관해 자유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2. 연구의 목적
새로운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어김없이 부동산 세금과 관련한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저항이 있었고 더 나아가 국민 분열을 초래하곤 했다. 이로 인해 제도가 정착되거나 안정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표적 사례가 토지공개념 3법으로 1987년 개정 「헌법」을 바탕으로 1989년 <택지소유상한에 관한 법률>, <개발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 <토지초과이득세법>이 제정되었다. 이는 공익적 성격이 강한 토지를 소수에게만 이익이 편중되고 사유화되는 것에 대한 대응으로 공공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사유재산권을 제한하거나 유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이 3법은 이해당사자에 의한 거센 반발과 지속적인 위헌 소송으로 결국 위헌, 헌법불합치 판정 등으로 폐지까지 이르게 되었다(유기현, 2018: 111).
이렇듯 제도를 새롭게 만들거나 또는 기존 제도를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는 제도의 제정과 변화로 손실이 있는 집단과 혜택을 보는 집단이 구분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Krasner(1984)도 제도는 쉽게 변하지 않으며, 이는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제도는 점진적 변화보다는 전쟁이나 정권변동, 경제적 공황 등과 같은 사건으로 단절적으로 변화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Streeck and Thelen(2005)는 단절적인 제도변화 외에 환경적 변화에 적응하며 점진적으로 제도가 변화하는 경우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두 학자의 주장과 이론을 통해서도 제도변화는 쉬운 일이 아니며 시간이라는 변수가 작동함을 시사한다.
조선시대 세종의 경우 토지에 대한 세금을 담은 공법(貢法)을 제정하기 위해 17만 명의 전·현직 관료부터 촌민에 이르기까지 제정되는 법에 대한 가부(可否)를 묻기도 하였으며, 법 제정까지 약 15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이를 최근 관점에서 본다면 국가정책의 추진에 있어 여론수렴 및 통합, 협치, 숙의 등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
이 연구는 과거 조선시대 토지에 대한 전세(田稅) 수취방식1)의 변천과정 분석을 통해 현 시대의 조세정책에 대한 시사점을 찾고자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위해 우선 수조지 분급방식에 따른 토지제도 변화요인에 대해 분석하고, 제도변화에 따른 세금 수취방식에 대한 분석을 진행하여 현 시대 세제정책의 시사점을 도출한다.
Ⅱ. 연구방법 및 분석틀
1. 관련 선행연구
관련 선행연구 특히 조선왕조실록 문헌을 분석한 연구는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서 약 900여 건이 검색되고 있다. 연구영역 분야는 인문학을 비롯한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의약학, 예술·체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중 사회과학의 비중은 높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를 도시 및 부동산학으로 한정하여 살펴보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문헌중심의 연구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김흥순(2009)은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분석하여 조선후기 도시계획에서 나타난 근대성을 연구하였고, 도시계획에 관련한 내용이 중심이다. 또한 유기현(2021)의 연구는 조선왕조실록 문헌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부동산정책 중 주택정책을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당시 주택정책의 문제는 인구증가와 택지부족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본 연구의 주제와 관련된 조선시대 전세(田稅)정책 관련연구는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서 약 120여 건이 검색되고 있다. 시대적으로 조선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여 연구가 진행되거나 세종대의 공법(貢法), 대동법, 양전(量田), 실학사상에 나타난 조세 연구가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중 소순규(2020)의 연구는 세종대 공법(貢法)도입의 재정적 맥락을 분석한 것으로 새로운 조세제도 개편에 나선 원인은 무엇이고, 입법의 본래 취지는 어떤 것인지, 도입과정에서의 문제점과 재정사적 맥락에서 검토하였다. 그 분석결과 정액을 산출하여 국가의 예산이 부족하지 않으면서도 해마다 답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전세를 수납하겠다는 것이 세종의 구상이었으나 세종의 기획 의도와 달리 단기적으로 실패하였다. 하지만 이는 조선 중앙재정 구조정착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김기평·신춘우(2007)의 연구는 조선전기 전세제도를 조세법의 일반원인인 조세법률주의와 조세공평주의 관점에서 비교분석 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전세제도의 도입배경과 시행과정에서 나타난 다양한 세정(稅政)상의 특징과 문제점의 재조명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분석결과 조선전기 과전법과 공법의 시행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은 직무와 관련된 비리, 불공정 자의적 징수 등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선행연구 분석을 통해 사회과학 연구에서 특히 도시 및 부동산학 관련연구는 양적인 측면에서 극소수에 불과하며, 그중에서도 본 연구와 관련성이 있는 연구도 재정사 구조측면이나 조세의 일반원칙에 입각한 비교연구가 진행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와 달리 본 연구는 정책적 측면의 접근으로 정책결정 과정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또한 왕조실록의 정책내용만을 반영하기 보다는 결정과정에서 논의되었던 내용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도록 실록의 내용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는 당시에 결정과정에 대한 논의와 고민들을 직접 확인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2. 연구범위 및 방법
연구의 시간적 범위는 조선시대이며, 내용적 범위는 전세(田稅)정책 관련내용으로 한정한다. 관련 문헌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조선왕조실록 국역본 서비스를 기초(http://sillok.history.go.kr)로 연구를 진행한다.
연구방법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방대함을 감안하여 단계별 연구의 분석내용을 설정하고자 한다. 다만 단계별 분석내용 설정 이전에 수조지 분급방식의 토지제도 변천과 세금수취방식의 전세(田稅)제도 변천을 분석 후 진행하기로 한다. 단계별 분석의 1단계는 실록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대분류에서 전세(田稅)정책 연구와 관련이 높은 경제, 사회로 설정한다. 2단계에서는 해당 대분류 내 소분류를 설정하며, 3단계에서는 해당 소분류 내 세분류를 설정한다. 단계별 분석내용 설정 결과 총 검색건수는 3,567건이며, 단계별 설정내용 및 검색수는 다음의 그림과 같다.
앞서의 연구 범위 및 내용 설정에 따른 연구의 분석틀 및 흐름은 다음과 같다.
Ⅲ. 조선시대의 토지 및 조세 제도 변천
1. 수조지(收租地) 분급방식의 변화 및 배경
과전법(科田法)은 고려 공양왕 3년(1391년) 전시과 제도를 폐지하고 전제개혁을 위해 도입되었다. 고려후기 토지제도가 붕괴되면서 대토지소유를 기초로 한 농장(農庄)이 출현하였다. 대농장의 출현은 13~14세기 사회경제적 변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주요한 현상일 뿐 아니라 봉건적 토지소유와 조선 봉건사회발전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현상이다(허종호, 1991 재인용_김륜희 외, 2017: 87).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고, 백성들은 예속민이나 농노로 전락하면서 국고는 고갈되고 군사력이 악화되어 중앙집권적 왕권이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성계와 조준 등의 신진세력이 대두되면서 통치기구를 개혁하고 전제개혁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토지제도를 정비하기 위하여 양전사업부터 진행하였다. 이는 단순한 측량 사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를 은닉하고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것을 밝혀 재분배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김륜희 외, 2017: 87). 이들 세력은 창왕을 축출하고 공양왕을 즉위시킨 뒤 1390년(공양왕 2)에 종래의 공사전적(公私田籍, 토지문서)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이듬해 새로운 전제(田制)의 기준이 되는 과전법을 공포한다.
과전법에 의한 전제개혁은 신흥사대부에 의한 새 왕조 조선조 개창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전국의 토지를 국가 수조지로 편성한 후 수조권(收租權)을 정부 각처와 양반 직역자에게 분급한 것으로 귀속 여하에 따라 사전과 공전으로 구분하였다. 중앙과 지방의 관인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서 국가의 기능유지와 지배층의 신분을 유지하게 하는 제도이다. 사전은 경기도에 한하여 직산자(職散者)의 고하에 따라 제1과 150결에서 제18과 10결까지의 땅을 지급하되, 당대로 한정하였다. 수조권은 개인이나 관아에 속해 있었다. 공전은 경기도를 제외한 전국의 토지로서 수조권이 국가에 소속되었다(김륜희 외, 2017: 88).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신진사대부 세력에게 재분배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시키고, 전주와 전호의 관계를 규제하여 조세개혁을 통한 국가재정 확충에 그 목적이 있었다(김기평외1, 2007: 2042).
과전법에 의한 토지개혁은 경자유전에 의한 균등분배가 아니고, 수조권의 재분급에 불과하였으므로 토지소유의 불균등과 빈부의 차에 발생하는 모순뿐만 아니라 토지의 세습화가 될 여지가 있었지만, 전호의 부담을 적게 한 점과 전주는 전호의 경작지를 함부로 빼앗지 못하며, 전호도 경작권의 양도나 매매를 금지하여 모든 농민을 한층 토지에 고착화하려 하였다.2) 반면 과전·수신전·휼양전 등이 점차 세습되었고, 공신과 관리의 증가로 사전의 부족을 초래하였다(김륜희 외, 2017: 88).
조선 초기 과전법을 기초로 각종 토지유형들의 재정비, 수조제도의 개정 등이 진행되었으며, 토지정책의 재정립을 위하여 사원전의 대량 축소, 공법 제정 등을 실행하였다. 과전법은 새 왕조를 공고히 함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으나, 수신전과 휼양전 등은 세습이 가능함에 따라 수조지가 부족하게 되었다(강만길 외, 1995, 「한국사」, 한길사 재인용_김륜희 외, 2017: 87). 이를 위해 불과 2년 후인 1393년 과전급여액을 축감하는 방향에서 과전법을 개정하여, 수신전·휼양전을 없애고 대신 은사미 명목으로 쌀을 주려했으나 실행되지 못하고 대신 진고법3)을 실시하였으나 이도 곧 폐단으로 인하여 폐지되었다. 이것이 1466년(세조 12) 직전제가 실시된 배경이다.
이러한 이유로 기존의 전·현직 관료에게 지급하던 것을 현직관료에게만 수조권을 부여하는 직전법을 시행하게 된다. 이는 국가재정 확보와 사전증가를 억제하기 위한 조치이다. 그 결과 관료 양반들은 수조지를 세습할 수 없게 되어 국가는 많은 과점을 회수함으로써 국고수입을 늘릴 수 있게 되어, 정치·경제적으로 중앙집권화의 기본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토지소유 욕구증가로 농민 착취가 증가하는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이미 대토지소유자로 성장한 관료양반들은 직전제의 실시로 줄어든 수조권 대신 소유지를 확장하려 하였고, 이로 인해 토지점탈 행위가 격증하여 관료양반들의 사적지주화 경향이 강화되었다(김륜희 외, 2017: 112). 또한 직전법 시행으로 주현아록전, 군수전의 격감, 학전의 축감 등 공전을 간소화하여 국고를 충당하고자 사원정리 사업을 추진하여 많은 사원전을 몰수 또는 회수하였으나 국가재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관수관급제는 국가가 직접 직전(職田)의 조(租)를 받아 전주에게 지급하는 제도이다. 국가에서 수조권을 대행하고 관리에게는 미와 포를 지급하였다. 이는 직전법 체제하에서 급료의 지급방법을 바꾼 것이다. 이 제도는 관리들의 토지 사전화를 억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토지의 세습과 겸병, 수조권의 남용 등의 불법행위가 지속되었다.
1556년(명종11년) 사전제도의 기본인 직전제를 완전히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 관리에게 수조지를 지급하지 않고 오직 미곡이나 포(布) 등 현물로 녹봉을 지급하였다. 직전제의 폐지는 직전 부족에 대한 대안이기도 하였으며, 수조지 제도의 소멸을 의미한다. 이후부터 토지유형은 토지소유권에 기초하여 분류하게 되었다. 공사전의 개념은 소유권을 기준으로 한 공유, 사유 토지의 개념으로 단일화되어 갔다.
2. 수조지 분급방식의 변화에 따른 세금 수취 변화
과전법 하에서의 토지는 국가가 사용료를 받는 공전(公田)과 개인이 토지사용료를 받는 사전(私田)으로 구분된다. 공전은 국가가 소유한 토지에 대하여 지세(地稅)를 받는 토지이고 사전은 관리에게 주는 과전과 공신에게 주는 공신전이 있다. 농민에게 경작권을 주면서 사전을 받은 자가 농민들에게 세금을 받았다(문점식, 2012: 33).4) 이는 경작자가 수조권자에게 납부하는 전조(田租)를 의미하며, 수조권자가 국가에 납부하는 전세(田稅)5)와는 다른 개념이다.
과전법 시행으로 전호(佃戶)6)가 전주(田主)에게 50%의 조를 바치던 병작반수제가 금지되고 수확의 1/10(1결당 30두)을 징수하였다. 조선 건국 당시의 세금은 전통적인 조(租)·용(庸)·조(調)방식이며, 토지에 대한 세금은 기본적으로 수확량의 10%이며, 1결당 생산량을 300두로 추정하였으므로 30두를 납부하였다. 30두는 최고 세액이며, 수확의 감수 정도를 반영하여 조세를 감면하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적용하였다. 손(損)과 실(實)을 각각 10분(分)으로 나누어 손재(損災)가 1분(分)에 이를 때마다 3두씩 감세하였으며, 손재가 8분(分)에 이르면 전액 감면하도록 하였다.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은 비옥도에 따라 토지 등급을 상·중·하로 나누고, 이를 위해 농작상황을 조사하게 된다(답험). 풍년이면 세금을 높게 부르지만 흉년이면 그만큼 손실을 감소해 준다. 공전은 지방관인 수령이 답험하고(관답형), 사전은 전주, 관리가 직접 답험한다(전주답험). 이처럼 수확의 정도에 따라 조세를 납부한다는 취지에서 공평한 과세로 평가할 수 있으나, 그 방식 즉 답험에 있어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추수기에 관원이 직접 논밭에 나가 수확량을 보고 세금액수를 감면해 주는 과정에서 관원이 부정행위를 자행하였고, 수조권자가 직접 답험함에 따라 흉년이 들어도 이를 반영하지 않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 이에 대응할 만한 세제의 변화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공법(貢法) 제정의 배경이 된다.
1430년 호조에서 답험손실법을 폐지하고, 모든 농지에 대하여 해마다 1결당 10두씩 거두는 정액세제안을 마련한다. 이 안에 대하여 중앙의 관료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17만여 명의 의견을 물으면서 공법(貢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그러나 자연조건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금을 일정하게 고정시키는 것은 과세형평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이 안은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김륜희 외, 2017: 156).
이후 1436년(세종 18년) 영의정 황희 등이 공법절목을 마련하여 지역적인 토지생산력과 토지의 비옥도를 함께 고려한 정액세법의 골격을 갖추어 나갔으나, 당시의 생산력 수준과 수취구조 아래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경제적인 잉여를 전혀 얻을 수 없게 되어 실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전국 토지의 등급 재조정 및 최고세액을 낮추는 등 제도적 시행착오를 거쳐 비옥도에 따라 6등급, 풍흉년에 따라 9등급으로 구분하고, 상상년에는 1결당 20두, 하하년에는 1결당 4두로 징수하는 개편된 공법이 확정되었다(1444년, 세종 26). 토지의 기름진 정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어 등급별로 1결의 면적을 달리하여 구성하였다. 1결당 20말을 징수하였는데 이를 전분육등(田分六等)이라고 하고, 매년 흉·풍년의 정도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각각의 연도의 작황에 따라 세금을 감면 정도를 정하였는데 이를 연분9등(年分九等)이라 한다(문점식, 2012: 34).
공법(貢法)은 전주답험을 폐지하고 국가가 기준을 정해 준다는 점에서 기존의 방식과 큰 차이가 있다. 이로써 답험에 대한 관리부정의 문제를 차단한 조세제도의 혁신으로 공평과세의 실현으로 평가받는다.
세종 때 만들어진 공법에 따른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과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은 판정과 운영이 복잡하고 세율도 높아 현실적으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15세기 말부터는 풍흉에 관계없이 최저 세율에 따라 하지하(下之下) 4두, 하지중(下之中) 6두로 연분을 일률적으로 적용해 징수가 관례가 되고, 이를 명문화하여 1결당 4두로 고정시키는 정액세제 방식으로 전환하기에 이르며 이것이 1635년(인조 13)에 제정된 영정법(永定法)이다. 영정법은 영정과율법(永定課率法)이라고도 한다.
이 영정법은 풍흉에 관계없이 토지의 비옥도만을 반영하여 1결당 4두로 고정화 한 것으로 공법에 비해 공평한 조세로 평가하기 어려움이 있다. 또한 농지에는 대동미(大同米), 삼수미(三手米) 결작(결작) 등 조정의 부세와 여러 명목의 잡부금이 부가되어 소작농의 부담이 컸으며, 이로 인해 전세 수취에 문제가 되었다.
영정법에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영조 36년(1760)에 비총법(比摠法)을 제정하고 시행하게 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수입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당해 연도 농사의 풍흉 정도를 파악하고 이것을 이전의 유사한 연도와 비교하여 올해 징수할 총액을 결정하고 그 총액을 할당 징수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비총(比摠)’은 총액을 당해 연도와 유사한 연도와 비교한다는 의미이다.
비총방식은 전세(田稅), 대동(大同), 삼수미(三手米) 등 전결세(田結稅) 외에 노비의 신공(身貢)·어세(漁稅)·염세(鹽稅)·선세(船稅) 등 잡세 징수에 광범하게 적용되었다(원윤희, 2019: 73). 비총법은 이후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까지 시행하게 된다.
Ⅳ. 조선왕조실록에서 나타난 전세(田稅)정책 기록 분석
1. 수손급손(隨損給損) 방식에 의한 답험손실법
왕조실록에서 나타난 답험손실에 대한 내용은 초기에는 기존의 전시과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수령이나 경차관(敬差官) 등이 답험을 하여 세금을 징수를 건의하는 내용이 주로 검색되고 있다. 이는 개별 경지를 대상으로 손실을 파악하여 이를 세금 징수에 반영하였다는 점에서 세부담의 공평성 차원에서 합리적인 제도라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이후 기록에는 오히려 제도의 장점인 답험에 대한 부작용에 대한 내용이 실록에서 다수 검색된다. 고을 수령의 모든 토지답험, 경차관 파견 등의 불공정, 과다 비용 및 전가, 이해관계자 관련 등 구조적 문제에 대한 내용이다.
먼저 답험을 제안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고려 왕조의 전제가 무너지고 토지겸병으로 백성들이 곤궁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며 고을 수령이나 경차관을 통해 답험하여 세를 거두자는 내용이다.
호조의 급전사(給田司)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고려 왕조의 말기에 기강(紀綱)이 문란하여 전제(田制)가 먼저 무너지니, 호강(豪强)이 다른 사람의 소유를 빼앗아 합치고, 부자 형제의 사이가 서로 송사(訟事)하여 국가와 민간이 모두 곤궁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기사년 무렵에 경기(京畿)와 5도(道)의 전지(田地)를 모두 타산(打算)하여 정(丁)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계산하는 기술이 익숙하지 못하여 시기를 한정하여 일을 마치게 되매, 경중(輕重)이 적중(適中)하지 못하고 혹은 빠뜨린 것도 있게 되며, 바다 가까운 땅은 또한 미처 계량(計量)하지도 못하였으니, 원컨대 조관(朝官)을 나누어 보내어 여러 고을 수령(守令)들과 더불어 답험(踏驗)하고, 관찰사로 하여금 고찰(考察)하여 천자문(千字文)의 자호(字號)로써 정(丁)을 만들어 그 세(稅)를 거두게 하고, -중략-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7월 26일 기해 1번째 기사 1398년)
이후 답험손실법이 점차 제도화되면서 이에 대한 폐해에 대한 기록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답험이 공정하게 진행되지 못함에 있고 이 경우 죄를 묻자고 제안한다.7) 또한 이러한 폐단에 따라 세종은 공법(貢法)의 시행을 논의하고 1, 2년간 시험해 보자는 제안과 함께 토지 1결(結)에 쌀 15두(斗) 또는 10두를 받는다면, 1년 수입이 얼마나 된다는 것을 호조에서 계산하여 보고하도록 한 기록이 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전지를 측량[量田]할 사목(事目)을 올렸는데, 그대로 따랐다.결실(結實)되고 결실되지 못한 것을 공평하게 답험(踏驗)치 못하여, 결실된 것은 조세(租稅)를 면(免)하고, 결실되지 않은 것은 도리어 조세를 바치니,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원컨대, 각도(各道)에 도장(道掌)을 세분(細分)하여 경차관(敬差官)을 나누어 보내서 그 결실되고 결실되지 못한 것을 조사하고, 그중에 답험을 공정하게 하지 않은 자는 육전(六典)에 의하여, 3품(品) 이상은 보고하여 논죄(論罪)하고, 4품(品) 이하는 직접 결단(決斷)하게 하소서. (태종실록 10권, 태종 5년 9월 10일 임인 1번째 기사 1405년)
최선(崔宣)을 익주(益州)로 유배(流配)하고, 박지(朴持)에게는 장(杖) 70대를 때렸다. 의용 순금사(義勇巡禁司)에서 아뢰었다.“최선의 죄는 율(律)에 정조(正條)가 없으므로, 다른 사람의 전택(田宅)을 침입 점거[侵占]한 조문에 의거하여, 장(杖) 80대와 도(徒, 노역을 시키는 형벌) 2년에 해당하며, 박지의 죄도 또한 정조(正條)가 없으므로, 재해(災害)를 입은 전지(田地)의 곡식을 답험(踏驗)하는데 함께 공모하여 작폐(作弊)해서 관(官)을 속이고 백성을 해친 조문에 의거하여, 장(杖) 1백대를 때려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4월 1일 계유 2번째기사 1409)
호조에서 아뢰기를,“매양 벼농사를 답험(踏驗)할 때를 당하면, 혹은 조관(朝官)을 보내기도 하고, 혹은 감사(監司)에게 위임하기도 하며, 또 많은 전답(田畓)을 기한 안에 모두 조사하여 끝마치고자 하므로, 향곡(鄕曲)에 늘 거주하는 품관(品官)으로 위관(委官)을 삼았는데, 위관(委官)과 서원(書員) 등이 혹은 보는 바가 밝지 못하고 혹은 사정에 끌리어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며, 덜기도 하고 채우기도 하며, 또 마감(磨勘)할 때에 당하여는 문서(文書)가 호번(浩繁)하여 관리들이 이루 다 살필 수가 없는 틈을 타서 간활한 아전[姦吏]들이 꾀를 부려서 뒤바꾸어 시행하게 되오매, 비단 경중(輕重)이 적중(適中)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지대(支待)하는 비용과 분주(奔走)히 내왕하는 수고 등 폐단이 적지 않사오니,(세종실록 47권, 세종 12년 3월 5일 을사 4번째기사 1430년)
“연전에 공법(貢法)의 시행을 논의하고도 지금까지 아직 정하지 못하였으나, 우리 나라의 인구가 점점 번식하고, 토지는 날로 줄어들어 의식이 넉넉하니 못하니, 가위 슬픈 일이다. 만일 이 법을 세우게 된다면, 반드시 백성들에게는 후하게 되고, 나라에서도 일이 간략하게 될 것이다. 또 답험(踏驗)할 때에 그 폐단이 막심할 것이니, 우선 이법을 행하여 1, 2년간 시험해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가령 토지 1결(結)에 쌀 15두(斗)를 받는다면, 1년 수입이 얼마나 되며, 10두를 받는다면 얼마나 된다는 것을 호조로 하여금 계산하여 보고하도록 하고, 또 신민들로 하여금 아울러 그 가부를 논의해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세종실록 46권, 세종 11년 11월 16일 무오 1번째기사 1429년)
2. 정액세 방식의 공법(貢法)
공법(貢法)은 세종 26년(1444)에 제정되지만 이를 위해 조정의 전·현직자 관료들과 지방 관찰사, 품관 및 촌민에 이르기까지 약 17만 명에게 가부(可否)에 대한 의사를 물었고, 세종 18년부터 25년까지 수많은 논의와 시험실시를 거치고 난 뒤 제정된 조세정책이다. 실제 운영과정에서 징수방법이 복잡하고 세부담이 상대적으로 무겁다는 문제가 있어 수정을 하게 되지만 답험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 정액세제 부과를 시도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공법에 대한 논의는 세종12년(1430) 호조에서 답험손실 폐지와 함께 모든 농지에 대하여 해마다 1결당 10두씩 거두는 정액세제안을 마련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논의와 수정이 거듭되는 과정이 진행된다. 다음의 내용은 이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1결당 10두의 정액세제안을 마련하고 이에 대해 육조 및 전직 품관과 수령, 여염의 세민까지 가부를 물어보라는 명을 내리는 기록이 있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중략- 청하건대 이제부터는 공법(貢法)에 의거하여 전답(田畓) 1결(結)마다 조(租) 10말[斗]을 거두게 하되, 다만 평안도(平安道)와 함길도(咸吉道)만은 1결(結)에 7말[斗]을 거두게 하여, 예전부터 내려오는 폐단을 덜게 하고, 백성의 생계를 넉넉하게 할 것이며, 그 풍재(風災)·상재(霜災)·수재(水災)·한재(旱災)로 인하여 농사를 완전히 그르친 사람에게는 조세(租稅)를 전부 면제하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하였다.(세종실록 47권, 세종 12년 3월 5일 을사 4번째기사 1430년)
호조에서는 공법에 대한 가부에 대한 결과를 당해 12월 세종에게 아뢴다. 찬성하는 자는 98,657명이고, 반대하는 자는 74,149명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조정 및 현직자, 전직자, 지방 관찰사, 품관 및 현민 찬반여부를 요약하면, 조정 및 현직자, 전직자는 찬성이 다소 많은 정도로 나타났으나 지방의 경우는 지역별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의 경우는 찬성이 압도적으로 많고, 반면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 강원도, 함길도는 반대가 많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비옥도에 관계없이 10두라는 정액을 부과함에 따라 비옥도 즉 그 지역의 생산량에 따라 그 결과가 극명하게 달리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8)
호조에서 중외(中外)의 공법(貢法)에 대한 가부(可否)의 의논을 갖추어 아뢰기를, -중략-무릇 가하다는 자는 9만 8천 6백 57인이며, 불가하다는 자는 7만 4천 1백 49명입니다.“(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8월 10일 무인 5번째기사 1430년)
가부(可否) 결정에 대한 이유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9) 찬성이유 중 특이한 것은 이전의 수손급손법(隨損給損法)과 새로운 공법의 병행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가부에 따라 그들이 원하는 제도를 시행하자는 논리이다. 또한 일정 지역에 시험한 이후 시행하고, 전지의 등급을 구분하여 시행함을 제안하는 기록도 있다. 전지의 등급을 나누자고 하는 내용은 결국 기름진 땅과 척박한 땅에 다른 세금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 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전 판목사(判牧事) 황자후(黃子厚) 등은 아뢰기를, -중략- 민간에서의 가부의 의논을 듣자오니, 평야에 사는 백성으로 전에 납세를 중하게 하던 자는 모두 이를 즐겨서 환영하고, 산골에 사는 백성으로 전에 납세를 경하게 하던 자는 모두 이를 꺼려 반대하고 있사온데, 이는 각기 민심의 욕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전 동지총제 박초(朴礎)는 아뢰기를, ‘공법이 비록 좋긴 하오나 전지의 비옥(肥沃)과 척박(瘠薄)을 분별하지 않고 전부 행한다면, 백성들 사이에는 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걱정하는 사람이 자연 있게 될 것입니다. 각도에 염문계정사(廉問計定使)를 나누어 보내어 그 전지를 심사하여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고, 이를 분류해서 지적(地籍)을 만든 뒤에, 공법을 시행할 만한 전지에는 공법을 시행하고, 그 나머지의 척박한 산전(山田)으로 공법을 시행하기에 부적당한 전지는, 매년 반드시 경작자의 신고를 상고한 후에 작황을 답사하고 수손급손법(隨損給損法)을 시행하여, 두 가지 법을 겸행토록 하소서.’ 하고,
집현전 부제학 정인지(鄭麟趾)는 아뢰기를, ‘먼저 경기(京畿)의 한두 고을에 시험한 다음 각도에 모두 시행토록 하소서.’ 하고, 직전(直殿) 안지(安止)는 아뢰기를, ‘먼저 산골과 평야 각 수십 개의 고을에 그 가부(可否)를 시험하게 하소서.’ 하고, -중략-, 집현전 부제학 박서생(朴瑞生)·전농 소윤 조극관(趙克寬)·형조 정랑 정길흥(鄭吉興) 등은 아뢰기를, -중략- 공법은 그 시행에 앞서 먼저 상·중·하 3등으로 전지의 등급을 나누지 않으면, 기름진 땅을 점유한 자는 쌀알이 지천하게 굴러도 적게 거두고, 척박한 땅을 가진 자는 거름을 제대로 주고도 세금마저 부족하건만 반드시 이를 채워 받을 것이니, 부자는 더욱 부유하게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되어, 그 폐단이 다시 전과 같을 것이오니, 먼저 3등의 등급부터 바로 잡도록 하소서.’ 하고, 예조 좌랑 조수량(趙遂良)·좌랑 남간(南簡) 등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전토는 기름지고 척박한 것이 〈지역에 따라〉서로 달라서, 상전(上田)은 1결에 조세로 10두를 징수하여도 받는 것이 너무 적은 편이나, 하전(下田) 1결에 조세를 역시 10두를 징수한다면 이는 받는 것이 너무 많으므로, 백성들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크게 다르오니, 전토의 등급을 나누어 9등으로 하고 조세도 역시 9등으로 정하여 민생의 편익을 주소서.’ 하고,
한편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면, 이전의 제도를 함부로 고치지 말자는 것이다. 또한 부자들이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고 가난한 자는 척박한 땅을 가지고 있어 이는 공평하지 못하다는 논리이다. 시대의 관점에서 재분배 또는 소외계층에 대한 세제 혜택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울러 답험의 폐단을 구제 방지하는 조건도 아울러 제시하며, 기존 수손급손법(隨損給損法) 유지를 주장하는 기록이다.10) 또한 생산량이 많은 토지에 10두만을 거둔다면 국가수입이 감소할 것을 염려하고와 흉년에 10두는 인민들의 곤란하게 하다는 내용의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8도의 찬반 이유와 동일하다. 결국 자연조건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비옥도에 관계없이 세금을 일정하게 고정시키는 것은 과세형평의 원칙에 벗어난다는 논리이다.
의정부 좌의정 황희(黃喜)·우의정 맹사성(孟思誠) 등은 아뢰기를, 우리 조선이 개국한 이래 조세(租稅)를 거둘 적에 수손급손법(隨損給損法)을 제정(制定)하니, 이는 실로 고금을 참작한 만대라도 시행할 만한 좋은 법인지라 경솔히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중략- 비옥한 전토를 점유하고 있는 자는 거의가 부강(富强)한 사람들이며, 척박한 전토를 점거하고 있는 자는 거의가 모두 빈한한 사람들이온데, 만약 호조(戶曹)에서 신청한 공법에 의해 시행한다면, 이는 부자에게 행(幸)일 뿐, 가난한 자에게는 불행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더욱이 함길·평안도의 전지의 조세는 다른 도의 수량보다 이미 감한 것인데, 이에서 또 감한다면, 만약 군병의 동원이나 큰 흉년이 있을 경우 이를 감당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판부사(判府事) 최윤덕(崔潤德) 등은 아뢰기를, ‘한 동네의 전지도 비옥하고 척박한 것이 같지 않고, 한 해의 곡식도 잘 되고 못 되는 것이 있습니다. 또 부유한 백성들의 전지는 좋은 것이 많고, 빈한한 백성들의 전지는 척박한 것이 허다하온데, 좋은 땅에 10두를 징수하는 것은 너무 경하고, 척박한 땅에 10두를 징수하는 것은 너무 중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익은 모두 부유한 백성에게 돌아가고, 빈한한 백성들만이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수손급손법(隨損給損法)은 우리 나라의 옛날부터 시행해 오던 세제(稅制)이오니, 구제(舊制)에 의하여 하시기를 바라옵니다.’ 하였다.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허조(許周)는 아뢰기를, ‘전지의 조세(租稅)는 수손급손법(隨損給損法)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중략- 현질(顯秩)을 지낸 자로 선택 임명하게 하고, 또 엄중한 규제법을 세워 회피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대간(臺諫)과 육조의 관원으로서 명망이 있는 자를 택하여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손실(損實)의 조사가 잘 되고 있는지 못 되고 있는지를 고찰하게 하면 전날과 같은 폐단은 거의 없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이러한 가부결정에도 이 안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수정안을 제시하고 다시 논의하게 된다. 세종은 시험 시행과 흉년에는 세를 감면해야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으며, 1결에 15두로 새롭게 제안하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가 설치되고 개편방안을 논하여 호조에서 새로운 공법 내용을 아뢰는데, 비옥도에 따라 전국을 3등급(상·중·하등도)으로 나누고 전품(田品, 상전, 중전, 하전)을 구분하여 도별 전등별 수세액을 정하는 방안이다.11) 이후 세종 19년(1437)에 세수를 인상하는 방향으로 안을 수정하였고 최고 세액은 수전(水田)은 조미(糙米) 20두로, 한전(旱田)은 황두(黃豆) 20두로 설정하였다. 세종 20년(1438)에 경상도와 전라도에 시험적으로 시행하였고12), 세종 22년(1440)에 경상·전라에서 시험실시하니 지품(地品)이 한 도(道)안이 같지 않으며, 고을마다 현격히 달라 일체로 조세를 거두는 것이 온당하지 못하고 공법을 시행하려면 9등급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아뢴다.13) 당해 8월 상전·중전과 하전만으로 구분하는 수정안을 마련한다,14) 상전과 중전은 땅의 품질이 크게 틀리지 않다는 이유에서이다. 세종 25년(1441)에는 충청도까지 공법을 시행하게 된다.15)
“임금이 말하기를,“내가 세무(世務)에 통달하지 못하니 조종의 법을 경솔히 고칠 수 없는 까닭으로, 공법을 지금까지 시행하지 못했으나, 지금 그 폐단이 이와 같으니, 1, 2년 동안 이를 시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나, 공의 수량이 많으면 백성들이 견딜 수 없으니, 만약 흉년을 만나면 수량을 감함이 옳을 것이다. 또 1결에 20두(斗)는 너무 많으니, 15두로써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너무 많아도 옳지 못하고 너무 적어도 또한 옳지 못하다.“(세종실록 71권, 세종 18년 2월 23일 기미 2번째기사 1436년)
여러 도의 토지의 품등을 먼저 정하여 3등으로 삼았는데, 경상·전라·충청의 3도를 상등으로 삼고, 경기·강원·황해의 3도를 중등으로 삼고, 함길·평안의 2도를 하등으로 삼았으며, 또 본디 정한 전적의 상·중·하 3등에 의거하여 그대로 토지의 품등을 나누어, 각도와 토지 품등의 등급으로 수조하는 수량을 정하여, 상등도의 상등전은 매 1결에 18두로, 중등전은 매 1결에 15두로, 하등전은 매 1결에 13두로 정하고, 중등도의 상등전은 매 1결에 15두로, 중등전은 매 1결에 14두로, 하등전은 매 1결에 13두로 정하고, 하등도의 상등전은 매 1결에 14두로, 중등전은 매 1결에 13두로, 하등전은 매 1결에 10두로 정하고, 제주의 토지는 등급을 나누지 말고 모두 10두로 정하오니, 이와 같이 하면 옛날의 10분의 1을 징수하던 법과 건국 초기의 수세하던 수량에 비교해도 대개 또 크게 경한 편입니다.(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0월 5일 정묘 4번째기사 1436년)
호조에서 아뢰기를, 상등도(上等道)의 상등 수전(上等水田)은 매 1결마다 조미 20두, 한전(旱田)은 매 1결마다 황두(黃豆) 20두로 하고, -중략- 전날 소요하던 폐단과 명색 없는 비용이 가히 영구히 없어질 것입니다. 백성들의 이익이 많아져서 거의 현실에 마땅하며, 공사간에 편리하여 옛날 공법의 좋은 점에 합치할 것이니, 이것으로써 일정한 법식으로 정하소서.” 하였다.(세종실록 78권, 세종 19년 7월 9일 정유 1번째기사 1437년)
의정부에서 호조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경상도·전라도의 상등(上等) 고을의 상전(上田)·중전(中田) 1결(結)은 20두(斗)이고, 하전(下田)은 17두(斗)이며, 중등(中等) 고을의 상전·중전 1결은 19두, 하전 1결은 16두이며, 하등 고을의 상전·중전 1결은 18두, 하전 1결은 15두입니다. 충청·경기·황해도의 상등(上等) 고을의 상전·중전 1결을 18두, 하전 1결은 15두이고, 중등 고을의 상전·중전 1결은 17두, 하전 1결은 14두이며, 하등 고을의 상전·중전 1결은 16두, 하전 1결은 13두입니다. 강원도·함길도·평안도의 상등 고을의 상전·중전 1결은 17두, 하전 1결은 14두이고, 중등 고을의 상전·중전 1결은 16두, 하전 1결은 13두이며, 하등 고을의 상전·중전 1결은 15두이고, 하전 1결은 12두입니다.1. 지금 양전(量田)한 척수(尺數)를 살펴보니, 상전(上田)과 중전(中田)은 땅의 품질이 그리 틀리지 않고 척수도 아주 다르지 않으므로, 상전·중전의 조세(租稅)의 등급을 같게 정한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고, 하전은 예전에는 척수(尺數)를 많게 하여서 조세의 등급을 같게 하였으나 척박(瘠薄)하고 진손(陳損)된 것이 항상 많으니, 이제 상전과 중전은 같은 등급으로 하고, 하전은 차감(差減)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세종실록 90권, 세종 22년 8월 30일 기해 3번째기사 1440년)
공법 시행을 위해 많은 논의와 가부를 묻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지만, 기존 부담과 많은 차이가 있는 등 논란이 계속되어 그 시행에 어려움이 있었다. 세종 26년(1444)에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에서 전품을 6등급으로 나누고 연분을 9등으로 나누는 조세법을 마련하게 된다.16) 내용을 요약하면, 하등전(下等田) 1결(結)의 면적은 57무(畝)로 기준을 삼고 대체로 상상년(上上年)의 1등 수전(水田)의 소출을 80석으로 정하고, 6등 수전의 소출을 20석으로 정하고, 한전(旱田)의 소출은 수전의 수량에 준하여 전례(前例)에 따라 절반(折半)으로 정하는 것으로 한다. 가령 상상년의 수전의 세납이 쌀 20말[斗]이면, 하전의 세납은 콩으로는 20말, 쌀[田米]로는 10말로 정하는 방식이다. 수세(收稅)는 20분의 1비율로 하며, 상상년(上上年)의 1등 전지의 조세는 30말, 6등 전지의 조세는 7말 5되로 한다. 연분(年分)을 9등으로 나누고 10분 비율로 정하여 전실(全實)을 상상년(上上年)으로 하고, 6등 전지의 조세는 1말 5되가 된다.
이 기록에 따라 1결당(57무 기준) 생산량과 세액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즉 1석(石, 섬)=15두(말), 피곡(皮穀) 2단위=미곡(米穀) 1단위 기준으로 1등급 전지의 조세액을 계산하면, 생산량 피곡 1200두(피곡 80석 x 15두)에 세율 1/20을 적용하면 피곡 60두가 된다. 피곡은 미곡은 절반에 해당하기에 최종 세액은 미곡 30두가 된다. 6등급의 경우도 같은 계산방식을 적용하면 세액은 미곡 7.5두가 된다.
그런데 6가지 등급을 모두 1결 57무 기준 조세징수를 각각 다르게 하면 조세징수가 번잡하고 계산하기도 매우 곤란하여, 상상년 20두의 전조를 받을 수 있는 면적으로 1결을 새로 정하면 1등급은 38무(57무X20두÷30두), 6등급은 152무(57무X20두÷7.5두)로 계산된다. 동일 면적(1결=57무)에서 세액 산출할 경우 등급별로 세액이 상이하게 계산되던 방식을 20두 전조를 받을 수 있는 면적으로 등급별로 환산하면 면적이 상이하지만 세액은 동일하여 조세징수를 간편하게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산출된 세액은 다음 <표>와 같으며, 상상년 20두, 하하년 4두가 된다.
3. 고정세액 방식의 영정법(永定法) 및 비총법(比摠法)
세종 26년(1444)에 마련한 새로운 공법(貢法)체계는 토지를 6등급으로 구분하고 매년 풍흉의 정도를 반영하여 연분 9등으로 세액을 계산하게 된다. 조세부담을 실질적 차이에 상응하게 설정하여 납세의 합리성을 도모하고자 하였다(원윤희, 2019: 77). 기존 공법이 토지를 3등급으로 구분하여 정액세는 실질적으로 대다수의 토지가 하등전에 해당하기에 토지의 등급에 따른 납세상의 차이가 거의 없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또한 기존의 동일한 면적의 토지를 기준으로 상이한 세액을 부과한 것에 비해 새로운 공법은 동일한 생산량을 기준으로 등급을 정하여 연분에 따라 세액이 달라지도록 설계하였다. 이에 대해 원윤희(2019: 72)는 매년도 손실을 고려한 연분방식은 과거의 답험손실법과 유사하여 매년 그 폐해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최대 과제가 국고수입의 증대와 답험과정에서의 중간수탈 및 불공정성이라는 폐해를 차단하기 위한 새로운 체계의 정비라는 관점에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정책으로 판단된다.
이후 공법의 운영과정에서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게 된다. 전분 6등, 연분 9등의 총 54등급으로 과세단위를 성정하여 정률세를 바탕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방식은 너무 복잡하고 세부담도 상대적으로 컸다. 또한 양반층·지주층의 신분상의 이익이 토지등급 결정에 반영되는 문제가 있었다. 즉 지주의 땅은 비옥하더라도 대부분 5,6등급으로 결정되고 농민의 낮은 등급의 토지는 실제보다 높게 책정되었다. 연분에 의한 등급도 대규모 토지소유자에게는 유리하였지만, 농민의 경우는 재해가 있어도 면제받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로 인해 15세기 말 이후에는 풍흉에 관계없이 최저 세율인 4~6두의 전세를 수취하는 것이 관례가 되고 인조 12년(1634)에 영정법(永定法)을 제정하여 이를 제도화하기에 이른다(김륜희 외, 2017: 161). 즉 풍흉에 관계없이 비옥도(등급)를 기준으로 1결당 4두로 고정시키는 법제화를 시도하였다.17)
영정법으로 인하여 징세액은 낮아졌으나 농민의 대부분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소작농이어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부족한 세수를 보충하기 위하여 대동미와 삼수미 결작 등의 세금과 각각 명목의 수수료 운송비를 추가로 징수함으로써 오히려 농민들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이에 따라 숙종 때부터 징수할 세금의 총액을 미리 정해놓고 지역에 할당하는 비총법이 시행되고 영조 36년(1760)때 법제화되었다. ‘비총’은 총액을 비교한다는 것으로 당해연도 농사의 풍흉 정도를 파악하고 이전의 유사한 해와 비교하여 올해 징수할 총액을 결정하고 그 총액을 할당 징수하는 방식이다(원윤희. 2019: 73). 이는 국가에서 전세 수입의 근원이 되는 전답(田畓)의 실결수(實結數)를 조사하여 국가의 총 세원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실시한 제도이다.18) 비총법은 이후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실행된다.
Ⅴ. 결론 및 시사점
1. 분석결과
이 연구는 과거 조선시대 토지에 대한 전세(田稅)정책의 변천과정 분석을 통해 현 시대의 조세정책에 대한 교훈을 얻고 향후 정책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찾고자하는 목적으로 시작하였다. 분석결과 조선시대 토지에 대한 세금의 수취방식은 토지제도의 변화를 기초로 한다. 조선 초기 토지제도 변화는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고 백성은 농노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국가재정의 고갈에서 비롯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중앙집권 즉 왕권의 악화 내지는 위기로 분석되며, 이러한 정당성을 기초로 조선초기 과전법이 도입된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는 조선조 개국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 권문세족의 토지 몰수를 통한 신진사대부에게의 재분배와 조세제도의 개혁을 통한 국가재정 확보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는 경자유전에 의한 분배라기보다는 수조권의 재분배에 불과하여 토지소유의 불균등과 빈부의 차에서 발생되는 모순은 여전히 존재하게 되며, 수취방식에 있어서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기존의 병작반수제와 비교해서는 획기적으로 세액이 낮아 졌지만 10%라는 최고 세액을 기준으로 수확의 정도에 따라 세액을 감면해 주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의 적용으로 수령이나 전주, 관리가 답험을 하는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부정부패 및 감면 적용의 폐단이 있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모든 농지에 대하여 1결당 10두씩 거두는 정액세제안이 마련된다. 이것이 세종이 17만여 명의 전·현직 관료 및 백성에 이르기까지 가부(可否)를 물었던 세제안이며, 이후 약 15여년의 수정 작업을 거쳐 제정된 공법(貢法)이다. 가부(可否)를 묻는 과정에서 지역별로 상이한 찬반 결과가 나타난다. 정액세제안은 비옥도와 풍흉에 관계없이 일정한 세액을 납부하는 것으로 비옥한 토지는 상대적으로 세금이 적고 비옥도가 떨어지는 토지는 많게 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다른 의견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결과에 따라 수정안이 마련되고 이를 재수정하는 방식으로 거듭된다. 최종적으로 토지의 등급을 6개로 구분하는 전분6등법과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는 연분9등법이 적용된다. 최종안은 기존의 전주 답험의 문제를 제거하고 국가가 기준을 정해준다는 점에서 공평과세의 실현으로 평가받게 되지만 이는 토지별로 54등급으로 산정방식의 복잡성과 연분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오랜 기간을 두고 제정되었지만 실제 활용에는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결국 1결당 4두로 고정하는 정액세제 방식으로 바꾸는 영정법(永定法)이 도입된다. 영정법 역시 풍흉에 관계없이 비옥도만 반영하여 1결당 4두로 고정화하게 되어 공평한 과제로 평가받지는 못한다. 게다가 조정의 부세와 여러 명목의 잡부금이 부가되어 오히려 소작농의 부담이 커지게 된다. 이에 따라 당해 연도 농사의 풍흉 정도를 파악하여 이를 이전의 유사한 연도와 비교하여 올해 징수할 총액을 결정하고 그 총액을 할당 징수하는 방식인 비총법으로 전환하게 된다.
조세정책은 공정성, 단순명료성, 안정성, 성장성을 기본원칙으로 한다(김기평·신춘우. 2007: 2038). 이 원칙의 관점에서 본다면, 답험손실법은 공정성을, 공법(貢法)은 단순명료성과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한 수취방식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두 수취방식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는 개혁입법이었다.
2. 부동산 조세정책의 시사점
본 연구는 조선시대 전세(田稅) 제정과정의 연구로 왕조실록 내용의 시기별 열거방식으로 분석하였다. 이는 정책내용만 인용하는 연구과 달리 당시 논의과정과 정책의 찬반 이유 및 고민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와 연구방법을 달리 설정하였다. 하지만 제도변화가 그렇듯 기본적으로 기존 제도의 폐단을 시정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변화되었다. 이를 통해 이러한 제도변화가 현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정책결정 과정을 통해 현시대에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먼저 정책의 결정과정은 기간이 소요되더라도 충분한 논의와 숙의 과정을 거쳐 결정되어야 정책집행에 있어야 본래의 목적에 따라 집행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제도로써 정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실록에서 기록된 공법(貢法)의 제정과정을 보면, 세종은 정부·육조,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가부(可否)를 묻고 이를 재수정하는 등 약 15여년에 걸쳐 그 타당성을 검증한다. 특히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그 참여범위를 확대하였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만하다. 당시는 현 시대와 같이 선거에서 표심을 기대하는 정치적 상황이 아니라는 점과 국왕에 의한 정책결정이 가능했던 시대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종국에는 처음 의도했던 내용과는 달리 결정되었는데, 이러한 결정과정을 거치지 않고 처음 내용이 그대로 집행되었다면 이 정책은 제도로써 정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현시대는 물론 당시 조선시대에도 확인이 가능하다. 예컨대 토지공개념 3법의 경우 충분한 정당성이 있었음에도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낼만한 이해관계자와의 갈등조정 과정을 거치지 못한 한계로 인해 정책이 정착화 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위협을 받게 되었다. 종국에는 위헌 및 헌법 불합치 판정으로 정책이 중단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토지개혁안에서도 나타난다. 토지겸병과 토지의 구조적 모순 완화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조선에 도입되기에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었고, 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집단과의 합의에 이르지 못한 한계로 제도가 실행되지 못하고 이상적 토지개혁안으로 남게 되었다(유기현, 2018: 124).
다음은 정책의 결정에 따라 수혜를 받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손실을 얻는 집단이 발생하게 됨은 반드시 인지하고 이에 따른 정책의 결정과 집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정책결정의 이해관계 당사자는 배제되어야 한다. 1결당 10두라는 정액세안에 찬성했던 지역은 생산량이 상대적으로 많은 경기, 경상, 전라도이고, 반대한 지역은 생산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평안, 황해, 충청, 강원, 함길도 지역이다. 이는 토지의 비옥도에 관계없이 정액을 부과하기 때문에 두 분류의 지역은 혜택과 손실이 극명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결과이다. 최종 가부(可否)는 찬성이 다소 많은 것으로 나타났지만, 황희 등의 조정 대신들 대부분이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 세종은 처음 내용을 수정하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사례는 현 시대에도 다르지 않다. 각 정권별 부동산 관련 세제정책이 추진되었고, 정책변화도 너무도 빈번히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수혜집단과 손실집단이 발생하게 되지만 이들에게 왜 이러한 수혜 및 손실이 나타나야 하는지 명확한 명분이 없다. 명분이 있다하여도 손실집단은 이에 대해 당연히 저항이 있게 마련이다. 이는 정책의 수정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정권교체 등으로 표출될 것이다.
각 정권별 부동산 관련 세금의 완화와 강화, 유예 등 상이한 공약을 내세우고 있다. 각각의 공약 내용에 따라 세금의 부담이 증가하거나 줄어들게 될 것이다. 유권자는 이에 대한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를 하게 된다. 세금의 강화와 완화에는 각각 그 목적성이 있을 것이다. 세금은 정부의 재정조달의 기능과 함께 사회정책적 기능이 수반된다. 세금강화는 투기억제 또는 소득 및 지원의 배분기능 목적으로 하고, 세금완화는 국민경제 안정 및 활성화 기능이 목적일 것이다. 조선시대의 답험손실법 도입은 대토지소유를 기초로 한 농장(農庄)이 출현으로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고, 백성들은 농노로 전락하면서 국고의 고갈에 대응한 전제개혁이었으며, 공법(貢法)의 도입은 탐험의 부정부패를 해결하고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정책 방향은 어떤 것인지 판단과 그 명분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정책 및 제도는 시장을 이기지 못한다. 정책 및 제도의 정비가 시장의 움직임을 앞서갈 수 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이 향후 정책방향을 인지하고 예측가능하도록 그 방향성을 제시하는 정책결정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결정된 정책의 집행이 가능하고 제도로써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21학년도 창신대학교 교내연구비에 의해 연구되었음(과제번호 창신 20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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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대학교 도시행정학과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창신대학교 부동산금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논문은 “Jeonse, will it be extinguished? Differentiation of Korean rental housing market, Journal of Housing and the Built Environment”(2018), “왕조실록으로 본 조선시대 주택정책의 고찰”(2021), “도시커먼즈 실현의 한계 및 가능성”(2021)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저성장시대가 불러온 전세대란(2015)』, 『도시미래와 재생(2017)』, 『서울시 시민숙의예산제 제도화 기초연구(2019)』, 『부동산을 이야기하다(2021)』 등이 있다. 주요 관심분야는 토지 및 주택정책이며 특히 전세제도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그 외에 도시재생, 통일이후 북한 토지, 토지은행, 균형발전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