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피해자 실존생애사 연구
초록
본 연구의 목적은 한국 원폭피해자 1세대가 겪은 원폭의 경험과 증언을 중심으로 피폭 당시의 상황과 귀국 후 피폭자로서 겪은 경험이 당사자에 의해 어떻게 의미화되었는가를 분석하여 자신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주요 연구방법으로는 생애사 주체의 삶의 주요 사건을 실존적 관점에서 기술하는 실존생애사 방법이 사용되었으며,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생애사 주체의 기억에서 이 기억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조건으로써 그 사회에 존재하는 책임의 사각지대를 발견했다. 둘째, 이러한 사각지대는 특히 취약집단에 대한 지배집단의 묵시적 방관자 역할을 한다. 셋째, 한국의 사회복지제도는 원폭피해 희생자들에게 가해진 정치적 폭력의 흔적들을 추적하여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그 기원을 외면하고 현재의 문제에만 집착했다. 원폭피해자 문제를 정책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희생자로서의 사회적 권리를 되찾을 수 있는 사회복지정책을 제도적으로 구축할 필요가 있다. 또한 1세대 원폭피해자들뿐 아니라 피해가족들에 대한 적극적인 실태조사와 국가, 지자체 차원의 사회복지서비스 지원체계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Abstract
The main goal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situation and experiences of the Atomic Bomb victims and the experiences of the Atomic Bomb victims after returning to Korea, focusing on the experiences and testimonies of the atomic bombs experienced by the first generation of Korean atomic bomb victims. The main research method used the existential life history method, which describes the main events of life from an existential point of view, based on dictated data by the research participant. Results show that 1) in the memory of research participant, we found a blind spot of responsibility that exists in the society as a social condition that enables this memory, 2) such blind spots serve as an implicit bystander of the vulnerable group's governing group. 3) the Korean social welfare system ignores its origins and only obsessed with the problem, rather than pursuing traces of political violence on victims of the atomic bombing and striving to resolve the problems. In order to solve the atomic bomb victims problematically, it is necessary to systematically establish a social welfare policy that can regain the social rights of victims. In addition to the first-generation atomic bomb victims, a survey of the victims' families and a national-level social welfare service support system should be prepared.
Keywords:
Atomic Bomb Victims, Existing Life History, Self-Existing Semantic Composition, Social Welfare Service키워드:
원폭피해자, 실존생애사, 자기실존의 의미구성, 사회복지서비스Ⅰ. 서 론
2020년 올해는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된 지 75년을 맞는 해인 동시에 원폭피해 75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2차 세계대전은 종식될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수십만 명에 이르는 무고한 사람들을 살상시키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일본은 자국의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식민지정책 일환으로 ‘징병제’, ‘국민징용제’, ‘여자정신근로령’ 등을 적용하여 수많은 조선인들을 침략전쟁의 도구로 착취했다(이치바 준코, 2000). 특히 억압적이고 잔혹했던 식민정책 탓에 고향 땅에서 살 수 없게 된 조선인들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건너갔고 1945년 8월 원자폭탄의 희생자가 되었다. 당시 일본 정부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 10만 명(히로시마에서 7만여 명과 나가사키에서 3만여 명)이 피폭되었고 희로시마에서 사망한 사람은 3만 5천명, 생존자는 3만 5천명, 나가사키에서는 사망자가 1만 5천명, 생존자는 1만 5천명으로 두 지역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총 5만여 명으로 조사되었다(일본 내무성, 1945). 해방 후 귀국한 피폭자(4만 3천여 명)중 대부분은 사망하였고,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등록된 피폭자는 2600여 명이 생존해 있으며 이중 1,500여명은 영남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한국원폭피해자협회, 2013).
매년 8월 6일이면 서울 대한적십자사회관과 경남 합천군의 한 복지회관에서 조졸한 위령제가 열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같은 날 8시 15분 일본 히로시마에서는 평화의 종이 울리면서 피폭자 유가족, 일본의 총리를 비롯한 시민단체, UN 및 전 세계 등지에서 파견된 외교사절단 수만 명이 운집한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식전에서 낭독되는 평화선언은 세계최초의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파괴된 도시와 시민들의 희생을 기리며 수많은 ‘히바큐샤’(원폭피해자)의 삶과 체험을 다음 세대에게 전승하고 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역사적 의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처럼 일본의 하바쿠샤는 세계 유일의 피폭국 희생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지만 같은 날 같은 곳에서 희생된 조선인 원폭피해자들은 오랫동안 자국의 역사적 공간에서 망각된 존재로 은폐되어 있었다(Yoneyama, 1999; 이치바 준코, 2003; 진주, 2004; 정근식, 2005; 권혁태, 2009; 오은정, 2013). 이 같은 사회적 망각과 정치적 배제 속에서도 한국 원폭피해자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존재를 스스로 드러내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왔다. 그 투쟁의 결과로서 오늘날 한국 원폭피해자들은 일본의 국내법인 원폭원호법에 근거해 피폭자건강수첩을 받은 히바쿠샤라면 일본 정부로부터 지급되는 피폭자건강수당과 의료비 등을 직접 지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인 원폭피해자 모두가 그러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 원폭피해자들 중 일부는 일본 정부로부터 ‘히바쿠샤’ 자격을 얻어 의료지원을 받고 있지만 대부분 자격을 얻지 못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피폭자 인정소송을 벌이고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그동안 원폭피해자들의 호소와 투쟁이 꾸준히 존재했음에도 우리사회에서 원폭피해자의 문제는 일부 시민단체들의 관심과 지원만 있을 뿐 사회적, 정치적으로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식민지 시기에 군위안부 문제는 한 여성노인의 구술증언을 계기로 은폐되었던 식민지 역사의 한 측면으로 떠올라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것에 비해 원폭피해자의 경험은 여전히 망각된 과거로 현재화되지 못하고 있다. 원폭의 경험이 우리사회에서 침묵과 금기의 영역으로 밀려나지 않고 원폭피해자들의 상처와 고통을 함께 공감하고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미래지향적 성장과 화해 못지않게 과거에 대한 성찰과 점검도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본 연구는 원폭의 경험을 겪었던 1세대 한국 원폭피해자의 구술생애를 중심으로 기존의 원폭피해 역사에서 다루지 않았던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생애사 연구의 기본 정향은 한 개인의 생애사는 단순한 개인의 삶의 총합이 아니라 사회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 발현적 산물이다(박성희, 2002). 한 개인의 정체성이 구축되기까지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요구된다. 그 하나는 생애사 주체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수동적 사건에 노출되어 그 사건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경험적 주체가 자신이 맞닥뜨린 사건을 내면화시켜 자신의 존재의미를 구축하려 한다는 것이다. 결국 원폭피해 1세대의 구술생애는 그 자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언어로 명명화하는 과정이기에 원폭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장 생생하게 드러내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 연구의 생애사 주체의 경험은 개인의 기억과 역사인 동시에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한국사회의 태도와 이데올로기, 무의식적 욕망과 갈등 등이 혼재한 역사적 사건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생애사 주체가 경험한 원폭피해라는 비극적 사건이 이후 자신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삶 속에서 어떻게 내면화되었는지 밝혀냄으로써 원폭피해 1세대가 생생하게 겪은 경험을 현재화하여 역사에서 외면되어 왔던 한국의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논의의 지평을 확장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본 연구를 통해 밝혀진 원폭피해자의 생생한 증언담을 통해 일본의 하바쿠샤만 피폭의 희생자로서 기억되지 않고 한국의 원폭피해자들도 자신의 존재를 자국에 입증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는 것을 반드시 기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단지 기록사적 가치만 지닌 것이 아니다. 한국정부는 일본정부가 취한 자국의 피폭자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이 도일 원폭피해자들에게도 지켜질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피폭자건강수첩을 받지 못한 대다수 원폭피해자들과 그 가족을 위한 정책적 지원방안도 함께 강구해야 할 것이다. 본 연구는 비록 한 개인의 피폭경험을 다루고 있지만 인류사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에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지금 우리사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그 방향성을 제시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이에 본 연구는 한국 원폭피해자 1세대가 겪은 원폭의 경험과 증언을 중심으로 피폭당시의 상황과 귀국 후 피폭자로서 어떤 경험을 했고 이러한 경험이 연구 참여자에 의해 어떻게 의미화되었는지 분석하고, 이러한 의미화 작업이 자신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밝히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Ⅱ. 문헌고찰
1. 원폭피해자에 대한 이해
지금까지 우리사회에서 원폭피해자에 대한 법적인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폭피해자와 관련된 용어는 국내 원폭피해 관련 연구물들과 피폭국인 일본의 자료들을 근거로 원폭피해자의 범위와 유형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국내에서 원폭피해자의 개념은 1991년 보건사회연구원에서 실시한 「원폭피해자 실태조사」에서 원폭의 피해정도, 피해자 및 피해유형에 따라 직접적 피해자와 간접적 피해자라는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원폭 직접 피해자에 포함되는 대상군에는 첫째, 원폭 직접 노출자로 히로시마나 나가사키 인근 지역거주자, 둘째 원폭 간접노출자(직접노출 지역 거주자)로서 피폭지내 가족, 친척, 친구를 찾거나 부상자 구조, 사체처리 등을 위해 피폭지에 들어간 사람(잔여 반사능 또는 방사선 노출) 및 죽음의 재(검은 비) 피해자가 포함되며 셋째, 태내노출은 원폭에 노출된 어머니의 태아가 포함된다. 다음으로 간접 피해자에는 원폭에 피폭되지는 않았지만, 원폭으로 인해 부모, 남편이나 부인, 자녀, 형제자매 등 가족을 상실한 사람, 그리고 이러한 가정의 새로운 가구원이 된 사람, 피폭자 2세 및 3세 등이 포함된다(송건용, 1991).
이러한 국내의 분류방식은 1990년 일본정부가 한국인 원폭피해자에게도 인도적 지원금을 지급한다는 결정이 내려진 후 이루어진 공식적인 실태조사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지만, 실제 한국 원폭피해자들의 피해보상 및 지원이 전적으로 일본 피폭자원호법1)의 규정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일본의 원폭피해자에 대한 개념규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일본 피폭자지원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피폭자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피폭자건강수첩을 발급받고 의료혜택을 지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일본정부가 규정하는 원폭피해자의 개념적 정의는 이론적, 정치·사회적 맥락을 넘어서는 원폭피해자들의 생존과 직결된 합법적 권리를 취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박성실, 2015).
일본정부는 원폭피해자를 피폭자로 정의하는데, 여기서 ‘피폭자’란 원호법 제1조에 제시된 네 가지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피폭자 건강수첩을 교부받은 사람을 뜻한다. 첫 번째 유형은 ‘직접피폭자’로서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당시 히로시마시 혹은 나가사키시의 구역 내 또는 정령으로 정하는 곳에 인접하는 구역 내에 있던 사람을 뜻한다. 두 번째 유형은 ‘진입자’로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부터 2주 이내에 원호활동, 의료활동, 친족찾기 등으로 히로시마시나 나가사키 시내(폭심지에서 약 2km 구역 내)에 들어간 사람, 세 번째 유형은 기타 신체에 원자폭탄의 방사능 영향을 받은 사람(사체처리 및 구호종사자), 마지막 유형은 상기 피폭자의 태아2)로 정의하고 있다. 위의 네 가지 유형 중 하나에 해당되는 자에게는 피폭자건강수첩을 교부하고 지정 의료기관에 방문하여 무료로 진찰, 치료, 투약 등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된다. 현재 국내에서는 1994년 이후 일본의 피폭자 정의를 적용하고 있으며 상기한 첫 번째와 네 번째 유형 중 어느 하나에 해당되는 자로서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 건강수첩 소지자는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의 행정에 따라 신고·확인 절차를 거쳐 건강수첩을 발급받은 사람, 둘째, 피폭시 상황 확인증 소지자는 건강 등의 문제로 일본을 방문할 수 없어 확인 절차를 거치지 못한 자에게 일본정부가 발급한 피폭확인증을 교부받은 사람, 셋째,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인증자로 1994년 이전 한국원폭피해자협회3)에 원폭피해자로 등록한 후 일본정부로부터 인증받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한편 속지주의 원칙을 빌미로 일본정부는 재한원폭피해자들에게 건강수첩 교부신청을 기각해버렸고, 35년 동안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아무런 보상도, 지원도 받지 못했다. 1970년 한국원폭피해자 손진두가 일본에 밀입국한 뒤 일본시민단체들의 지원으로 일본정부를 상대로 피폭자 인정소송을 진행하면서 재한원폭피해자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고, 1978년 승소판결을 받게 되면서 비로소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에게도 도일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계기가 열리게 되었다. 1998년 재한원폭피해자 곽귀훈이 오사카지방법원에 일본인 피폭자와 차별 없이 재한원폭피해자에게도 원호법을 적용하라는 재판을 제소하였고, 2002년 12월 오사카지방법원 공판에서 최종 승소하여 건강수첩 소지자 중 일본국외 거주피해자의 피해보상권을 최초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을 계기로 일본정부는 재외피폭자들에 대해서도 지원을 하고 있지만, 일본의 피폭자들과는 차별적인 지원으로 일관하고 있어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는 현재까지도 계속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오은정, 2013).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 국내 원폭피해자의 개념을 1994년 이후 일본의 피폭자 정의에서 적용한 첫 번째 유형인 직접 피폭자, 즉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당시 히로시마시 혹은 나가사키시의 구역 내 또는 정령으로 정하는 곳에 인접하는 구역 내에 있던 사람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이러한 정의는 원폭피해자를 규정하는데 한일 양국 모두 인정하는 원폭의 직접 피해당사자라는 점에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 분석하는 원폭피해자의 정체성은 원폭에 직접 노출된 당사자의 경험에 기반한 의미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광복 이래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인원폭피해자의 고통과 삶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사회에서 원폭피해자 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반영하듯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에 관한 국내의 연구는 극소수에 불과하며 그동안 출간된 국내 자료들을 시기별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초창기 연구는 주로 원폭피해자 1세에 대한 실태조사와 구술 자료집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75~1979년 동안 진행된 1차 실태조사는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의 도움을 받아 한국교회여성연합회와 일본시민단체가 주도하여 서울, 경기, 부산, 합천지역에 살고 있는 피해자 천여 명을 대상으로 원폭피해자들의 개인적 배경과 피해상황 및 현재상태 등을 포괄적으로 조사하였다. 한일 민간단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원폭피해자 문제를 지속적으로 방치하다 1990년대 한일정부가 원폭피해자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보상금지원방식에 초점을 둔 실태조사가 실시되었다(보건사회연구원, 1991). 이후 한국원폭피해자에 대한 지원이 본격화되면서 국내에서도 원폭피해자와 관련된 연구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김정경, 1993; 이상화, 1995; 이치바 준코, 1999; 백옥숙, 2005; 오은정, 2013). 주목할 만한 연구로 일본인 학자인 이치바 준코(1999)는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한 경남 합천의 1세대들이 도일한 이유를 역사적 자료들을 검토하여 피폭당한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보상이 지닌 당위성을 입증해냈다. 국내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연구들을 살펴보면 재한 원폭피해자 지원정책의 현황과 문제점을 분석한 연구(강수한, 2011), 한국원폭피해자 1세대들 자녀인 2세대 환우 가족이 겪는 사회적 고통과 낙인의 문제를 다룬 연구(박성실, 2015),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정체성을 다룬 연구(장성환, 2017), 일본 원폭피폭자원호의 제도화와 새로운 자격범주로서 피폭자의 의미구성을 다룬 연구(오은정, 2018), 원폭피해자들을 억압하는 지정학적 거대권력에 대항하는 피해자들의 극복전략을 분석한 연구(류제원 외, 2020) 등과 같이 최근의 연구 동향은 1세대 피해자 중심에서 벗어나 2세대 및 그 가족들과 원폭을 둘러싼 지정학적 권력 헤게모니에 대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연구주제가 다양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폭피해 1세대의 생애사를 다룬 연구는 아직까지 전무하다. 장성환(2017)의 연구는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정체성을 탐색하고 있지만 기존 증언자료집에 의존한 문헌학적 분석에 그치고 있어 원폭피해 당사자의 생생한 경험과 실존적 생애사의 의미를 밝혀 내는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한편 원폭피해자들의 증언집이나 수기는 피폭의 경험을 몸으로 기억해낸 살아있는 자료라 볼 수 있다. 원폭당시 상황에서부터 현재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고 무엇보다 원자폭탄과 핵문제, 한국원폭피해자들의 보상운동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정근식, 2005). 특히 한국사회의 무관심과 배제에 묻혀 있었던 원폭피해 당사자들이 증언이나 수기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원폭피해자모임이 결성되었고 원폭피해의 치료와 생존권 보장을 위한 투쟁 및 운동을 전개해나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증언집이나 수기, 영상물 등은 다양한 원폭피해자들의 실태를 과거에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까지 담아내지 못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원폭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자료들은 주로 1970~80년대 나온 것들로 시기적으로 원폭의 경험으로 한정되어 있거나 원폭으로 인해 고통이 심한 사례만을 선별하여 보여주고, 지역적으로도 제한되어 전체적인 모습을 보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또한 말하는 이를 ‘원폭피해자’로서만 규정하여 단일화된 주체로 한정하거나 설명적 구조로 이루어져 개개인의 구술성은 찾아보기 힘들다(진주, 2004).
이처럼 한국원폭피해자에 대한 연구가 불모의 영역으로 남겨진 이유는 크게 네 가지 요인으로 요약된다. 첫째, 원자폭탄이 ‘선의의 무기’로서 해방을 앞당겼다는 국민정서, 둘째, 원폭피해자 문제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의 미형성, 셋째, 원폭피해자에 대한 인식부족과 편견, 마지막으로 원폭피해자에 대한 기초자료의 절대적 부족이다. 이러한 지적을 뒷받침하듯 아직까지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정확한 전수조사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원폭피해는 자녀세대로 대물림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문가들의 경고와 우려에도 원폭피해자 2, 3세대에 대한 종단적 실태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불모의 영역으로 가려졌던 원폭피해 당사자가 겪었던 피폭의 경험과 이후 피폭자로서 겪은 고통과 사회적 배제와 무관심, 그 가운데 만들어진 생애사 주체의 정체성을 심층적으로 밝혀내는 일은 그 자체로도 의미있는 연구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사회적 약자로서 원폭피해자들이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을 세상밖으로 드러내서 우리사회가 이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하지 않고 사회적,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촉구하는데도 일정 정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Ⅲ. 연구방법
1. 실존적 관점에 기반한 네러티브-생애사 분석방법
일반적으로 생애사는 한 개인의 생애사를 통해 그 사회의 구체적 일관성(daskonkrete allgemeine)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생애사는 한 개인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에 의한 구성물이며 개인은 생애기간 동안 직면하게 되는 사회적 실재를 자신의 행위를 통해 나름대로 해석하고 이에 대응함으로써 삶의 이력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생애사 텍스트는 생애사 주체의 과거경험에 대한 진술 내지 그 진위 여부보다는 생애사 주체가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여 자신의 생애를 재구성하는가를 분석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구성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생애사는 이야기, 주관성, 시간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Rosenthal, 2008). 로젠탈(Rosenthal)은 생애사 텍스트를 서사적 이야기, 묘사, 주장으로 구분하고, 그 중 서사적 이야기를 체험의 현사실성을 담보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으로 제안하였다
그렇다면 생애사의 3가지 특징 중 가장 핵심적 특징으로 거론되는 이야기란 무엇인가? 이야기는 단순한 기억의 복고나 회상이 아니라 화자의 의미구성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화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은폐되었던 익명의 세계에서 탈은폐의 세계로 나온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바로 이야기를 통해서 구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존하다의 라틴어 동사인 Exsisto에서 Ex는 ‘~을 벗어나 향하다’의 뜻으로 실존은 자기의 주어진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초월의 세계로 자기 자신을 이끄는 것이다. 초월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벗어난 곳에서 자기에 대한 해석과 의미구성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내러티브-생애사 분석방법은 생애사 주체에 의해 구출된 현재와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이야기된 생애사’와 ‘체험된 생애사’로 나뉘며 서사적 진실성과 사실적 진실성의 상호연관을 통해 생애의 실재를 파악할 수 있다(김영숙 외, 2012). 따라서 연구자는 이야기 주체의 실존적 관점을 Rosenthal의 내러티브 생애사 분석방법과 결합시켜 실존생애사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 참여자의 생애를 실존생애사와 생애사 주체의 자기실존의 의미구성과 내용으로 분절하여 접근하고자 한다. 실존생애사에서는 생애사 주체의 구술데이터를 근거로 하여 삶의 주요 사건을 실존적 관점에서 기술하고 자기실존의 의미구성과 내용에서는 주체의 삶의 의미구성과 자기해석을 기술하고자 한다. 이때 실존생애사에서는 연구자의 해석적 관점도 게재되어 있다. 한 개인의 실존은 주관인 동시에 또한 객관이고 개인인 동시에 세계이다. 이 간극을 이어주고 보완하는 것이 생애사 청자의 해석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연구참여자 선정
본 연구에서는 Miles와 Huberman(1994)이 제안한 질적 연구 표집유형 중 전형적 사례 선택방법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전형적 사례 접근방법은 어떤 현상이나 문제를 탐구할 때, 정상적이면서 평균적인 것을 찾고자 할 때 사용한다. 연구자는 연구 참여자 선정 전,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삶을 주제로 한 문헌과 영상물 등을 검토하였다. 검토 결과 대부분의 원폭피해자들은 일본 히로시마의 하층 노동자계급으로 일했고 원폭투하 당시 가족이나 친지들을 잃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으로 귀환한 후에는 사회의 무관심과 자기자본의 취약함으로 인해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원폭피해자들은 또한 한국정부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를 상대로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건강수첩을 발급받았다. 원폭피해자들의 후유증은 당대에 끝나지 않았다. 적지않은 피해자들의 자녀들이 역시 피폭의 후유증으로 의심되는 원자병 증세를 앓고 있고 이로 인해 사회적 배제나 기회의 제한 등을 경험했다. 연구자는 이와 같은 요건을 모두 갖춘 개인을 찾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대상자를 선정한 이유는 원자폭탄 투하 당시 히로시마나 나카사키에서 원폭피해를 직접 경험한 도일 한국인의 생생한 증언을 확보하여 피폭 이후 어떤 삶의 고통과 시련이 뒤따랐고 오랜세월 원폭피해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의미화했는지를 분석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구자는 원폭 당사자들을 대변하고 있는 원폭피해자협회 회장을 통해 연구참여자를 소개받았고, 연구의 목적과 취지 등을 상세히 설명한 후 연구를 허락받았다. 연구참여자는 합천 평화의 집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고 투병 중에도 연구자의 인터뷰 요청에 적극 참여하였다.
3. 자료수집
생애사 자료는 생애사 주체인 김 할머니와의 심층면접을 통해 구성했다. 심층면담은 김 할머니가 가장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주거지에서 수행했다. 생애사 주체는 공은 자신의 생애를 회고함에 있어 억눌린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자주 울음을 터뜨렸고 이로 인해 인터뷰가 중단되기도 했다. 구술데이터 수집에 참여한 연구자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인터뷰시간을 최대한 짧게 했고 회당 15분의 단위로 진행했다. 그리고 생애사 주체의 상흔이 회복되기를 기다린 후 인터뷰에 임했다. 인터뷰 1회기 당 약 일주일의 간격이 있었다. 인터뷰는 7회를 수행했고, 회기 당 20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4. 자료분석
생애사 자료는 다음과 같은 절차를 통해 분석되었다. 첫째, 생애사 주체의 생애를 모두 9개의 개별구조로 분할했다. 둘째, 각 분절된 구조 속에서 각각의 중요한 생애사 테마를 발굴했다. 이때 구조보다는 내용에 충실했고 그 내용에 대한 생애사 주체의 자기해석과 의미구성을 중심으로 분석을 했다. 셋째, 실존생애사에서는 생애사 주체의 이야기를 연대기 순에 의하여 재배열했고 이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서술과 해석 작업을 병행했다. 넷째, 생애 의미구성과 내용분석에서는 연대기 순이 아니라 생애사 주체가 구술하는 체험의 시간순으로 구조를 만든 후, 생애사 주체가 자기의 실존차원에서 구성한 의미와 해석을 기술했다.
Ⅳ. 연구결과
1. 주체의 실존생애사 재구성
생애사 주체인 김희순(가명) 할머니는 88세의 여성으로 1928년 일본 교토(京都)에서 출생했다. 생애사 주체의 아버지는 경남 합천태생으로 고령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그곳에서 결혼을 했고 1920년 도일한 후, 후쿠오카(福岡)를 거쳐 히로시마(廣島)에 정착했다. 현재 90대 후반인 친언니는 후쿠오카에서 태어났다. 김 할머니는 아버지의 한국에서의 생활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아버지의 고향이 경남 합천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국에서의 고단한 삶을 유추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리우고 있는 경남 합천에는 600명 이상의 원폭피해자들이 생존하고 있다. 경남 합천에 원폭피해자 수가 이렇듯 많은 이유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일제의 수탈과 압제로 인해 삼천리 전 국토가 신음하였지만 농지가 부족하고 변변한 산업시설이 없는 경남 합천, 고령 등의 지역은 주민들은 생존자체가 문제였다. 자연히 생존을 위해 일본행을 택했고 군수산업 시설이 밀집된 후쿠오카나 히로시마에 집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땅이 아니라 끊임없이 조선출신 이주민들을 필요에 따라 집어삼키고 때로는 뱉어내는 배반의 땅이었다. 생애사 주체인 김 할머니는 아버지의 일본생활을 “뭐든 빈곤하게 살고 여기저기 댕기며 일했는데”라고 회상했다. 구술로 미루어보아 거처 없이 옮겨 다니는 유랑노동자였다고 할 수 있다.
김 할머니는 일본에서 소학교(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때 배운 일본어가 평생의 자산이 되었다. 그녀는 “일본에 가면 일본사람, 한국에 있으면 한국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일본어에 능통하다. 이중 언어자로서 원폭피해자들이 일본에서 건강수첩4)을 교부받는 일, 법정투쟁 등에 도움을 주고 있기도 하다. 김 할머니가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의지와 지원 때문이었다. 히로시마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어머니는 딸을 공부시켜도 소용없다는 아버지에 대항하여 입학을 관철시켰다. 김 할머니는 당시의 상황을 결연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 여성 아들 공부시켜도 소용없다카면⋯ 머시마들만 학교 넣고 여성아덜은 안널라캤는데 우리엄마 장사를 해보니까 여자도 배워야 한다. 하는 것 갔다가 느끼고 억지로 학교에 넣고⋯⋯.”
김 할머니는 소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창시개명(創氏改名)을 했다. 창씨개명은 1940년 당시 조선총독인 미나미지로(南次良)가 조선인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인들에게 일본식 성과 이름을 쓰도록 강요한 것이다. 당시 조선인들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취업은 고사하고 학교입학도 하지 못했다. 일본이라는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김 할머니의 가족도 창씨개명을 해야만 했다. 그녀의 새로운 이름은 마쓰모토 키미요였다. 김 할머니는 소학교를 졸업한 후, 고무공장에 들어갔으나 지독한 냄새를 견디지 못해 사직한 후, 히로시마의 시내버스 회사에 입사한 후, 차장으로 일했다. 김 할머니는 고무공장 공원시절과 버스차장 시절에 대해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2년이란 짧은 시절이라는 것과 누구나 경험하는 사회진출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17세에 이루어진 강렬한 생애사건의 기억 때문에 약하게 기명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김 할머니는 열일곱 살 때 아버지와 동향인 경남 합천출신의 한 청년과 결혼을 했다. 결혼 동기는 단순했다. 정신대에 착출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1940년 이후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치루기 위해 약탈했다. 물자를 공출이라는 명분으로 무수한 교회의 종(鍾)마저도 빼앗아갔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땅의 수많은 청년들은 징용되어 탄광, 군수물자 공장, 전쟁 기반시설 공사에 투입되었다. 여성도 끌려갔다. 이때 단 하나의 예외는 있었다. 바로 결혼한 기혼여성은 정신대 착출에서 제외되었다. 김 할머니는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벼락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 결혼할 생각도 없었는데 정신대 바람에 부랴부랴 17살에 그런께 12월 달에 결혼을 했지⋯⋯.”
김 할머니의 전 생애구술에 있어 남편에 대한 구술이 인색했다. 자신이 52세 때 남편이 사망했다는 것과 피부병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같이 장사를 했다는 보고서식의 구술이 전부이다. 부부간에 있을 수 있는 애정, 갈등 등이 나타나지 않는다. 부부문제를 객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부부문제를 외부에 표현하는 것을 꺼리는 정서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피폭 이후의 지옥같은 삶과 그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핍진할 정도의 생애 에너지를 쏟아 부었기에 부부간의 사적이고 은밀한 세계는 기억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김 할머니의 전 생애에 걸친 살아남기 위한 생존투쟁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지지될 수 있을 것이다.
김 할머니는 소위 방년(芳年) 18세 때 인류역사상 가장 잔인한 원폭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1945년 3월, 미군은 이미 오키나와(冲縄)를 점령했고 일본본토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은 국민총동원령을 내리고 소학교 학생마저 죽창으로 무장을 시키고 본토 방어준비를 했지만 이는 단말마의 비명, 몸부림에 불과했다. 미국은 재래식 무기로 일본을 충분히 점령할 수 있었지만 일본본토 점령과정에서의 대규모 희생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원폭투하를 결정했다. 당시 김 할머니는 일본을 강한 나라라고 믿고 있었고 일본이 패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우리는 몰랐는데 참 하는 소리가 일본나라는 강한나라, 전쟁 없는 나라라칸께에⋯ 뭐뭐 요새 전쟁 언제든지 알고, 일만해도 되는가, 이기고 우리들 그렇게 살았거든예⋯⋯.”
김 할머니는 히로시마에 암호명 리틀보이(Little boy)로 명명된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짜는 물론 시간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아이고 오늘은 고마 가기싫다. 한가한 사람도 있고 이러는데⋯ 8시 15분에 원폭이 떨어졌거든예 아침 원폭이 8시 15분에 그러니가 원폭이⋯⋯.”
일본인들이 원폭의 가공할 만한 위력을 알리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조성한 히로시마 평화기념관(Hiroshima Peace Memorial) 안에 있는 상징물인 시계탑의 시계는 8시 15분에 정지되어 있다. 김 할머니의 존재의 시간 역시 1945년 8월 6일 8시 15분에 멈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의 시간은 단순한 물리적 시간 생존을 위한 시간에 불과했다. 김 할머니는 리틀 보이가 투하된 후의 참상을 마치 눈앞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설명하듯이 구체적이고 상세히 기억, 구술했다.
“우리도 함숙집이라 되난께 가⋯ 가벼우니까⋯ 이거⋯ 삐꿈삐꿈삐꿈하이 이래이래 그⋯ 밀리도 못하고⋯ 함석하고 결리지⋯ 결리고 이래가꼬⋯ 뭐 빠꼼하이 시키나면 엄마가 뭐여 나와 가지고⋯ 엄마가 엄마는⋯ 여서여서⋯ 기리가지고⋯ 살이 이래이래이래 딱 디비지고⋯ 어예⋯ 넘 볼살은 썩어가⋯ 그래서 새끼들 살리겠다고⋯ 요리로 빼야만 냈어⋯ 끄잡아 내고⋯ 나도 다치고⋯ 나도 지금 내손이 좀 짜게졌지예⋯ 저기 무릎에 안 난데도 있습니다. 찍히고⋯ 막이래⋯ 그래가꼬⋯ 끄잡아냈는데⋯ 피투성이지예⋯ 피투성이가 됐는데⋯ 이웃사람이 우짜고 하꼬 이래 나온께네⋯ 그저⋯ 저 뭐 집이 주위에 그⋯ 인자⋯ 공기도 먼지가 가까운 곳에⋯ 뭐⋯ 뭐슨⋯ 그 약이고 뭐시고 하여튼⋯ 부하게 그렇습디가⋯ 집이 부하게 그렇는데⋯ 모든⋯ 도⋯ 도망을 갈 준비를 하는데⋯⋯.”
일본이 패망한 후 김 할머니는 히로시마 부근의 빈집에서 2개월 정도 거주하다 1945년 10월 한국으로 왔다. 하지만 남편의 고향 합천은 변변한 공장 하나 없었고 농사를 지으려 해도 토지가 없었다. 극심한 생활고로 인해 일본에서 챙겨온 옷가지나 생활 잡화를 팔아 연명했지만 한계에 봉착했다. 한국에 온지 채 1년도 안 된 1946년 6월 소유한 모든 것을 팔아 밀항자금을 마련했고 일본으로 밀입국했다.
“그러니까 인자 뭐 온갖 거 다 팔고 옷도 팔고 뭐 팔고 이래 쌌타가 도저히 이래 살데가 못된다. 이래 가지고 이듬해 서서히 45년 해방되고 46년 6월 달에 타고 일본간다고 말이지⋯ 그 때 모집해가고 데꼬간 사람이 있었어예⋯⋯.”
김 할머니와 그 남편은 일본으로 밀항하여 두 달 동안 체류했지만 곧 밀입국자로 체포되어 한국으로 강제송환을 당했다. 이때 김 할머니는 일본에서 귀국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것은 일본에 대한 미련이라기보다는 극도의 생활고 때문이었다. 남편의 고향인 합천으로 되돌아갔지만 부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혹독한 가난이었다.
“아이고, 오죽하면 그랬겠어요. 오죽하면⋯ 나는 친정 얻어먹으러 가고 자기는 이 합천에 오고 합천에 와서 친삼촌 집에서 일하고 있고 난주 어서 보니깐 나는 친정모친 엄마 에미로 친정에 가고 그 때는 천신만신의 뭐 한국에 와서 밥 얻어먹는 사람이 많엤어예, 부자 집에 가면 밥 한 숟가락 주면 한 그릇 주어도 될낀데, 한 숟가락씩 특별히 떠주는 그 조금 달라고 주고 그서 옛날에 그 송기 저거 베끼는 송기 껍데기는 가운데 꺼 베껴가지고 그 우를 째갔고⋯ (이하중략) 한국에 안 와도 될낀데, 안 나와도 될낀데⋯ 내 안 나와도 될낀데⋯⋯.”
위의 구술처럼 김 할머니는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김 할머니는 어머니가 있는 부산으로 가서 생활했고 남편은 고향에 잔류했다. 부부의 이산은 이렇듯 생활고 때문이었다. 약 십년을 이산가족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부부는 다시 살림을 합쳤고 고향에서 철물장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1남 3녀를 키워 모두 출가시켰다. 김 할머니의 자녀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어려운 살림 속에서 고등학교를 졸업시킨 것을 큰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다. 김 할머니는 1980년 할머니 나이 52세 때 남편을 여의었다. 남편이 사망한 지 2년 후 철물장사를 폐업했고 십년 넘게 홀로 생활하다가 71세인 1998년 원폭피해자를 위해 건립한 복지회관에 입소하여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다. 김 할머니는 원폭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원폭피해자협회가 창립된 지 14년이 넘도록 협회에 가입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편이 사망한 후 2003년도에 이르러서 비로소 협회에 가입했다. 김 할머니가 원폭피해자협회에 가입하지 않았던 이유는 남편의 적극적인 만류 때문이었다. 남편은 생전에 자신들이 원폭피해자임을 늘 감추려고 했었다. 심지어 자손들에게도 그것을 알리지 않았다. 원폭피해자임을 이렇듯 적극적으로 감춘 이유는 자식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원폭피해자 2세에게도 병이 유전될 수 있다는 과학적 증거는 원폭피해자 2,3세들의 복지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는 분명 기여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원폭피해자 2, 3세에게 사회적 낙인을 부여했고 근거 없는 불안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김 할머니의 작고한 남편은 가려움증을 앓았는데 아들 역시 약간의 가려움증이 있었다. 김 할머니는 이에 대해서 극도의 공포심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런데⋯ 알레르기가 그자 이 이렇게 생기고⋯ 이래 약을 사다⋯ 무야 되고 요거 약을 발라야 되고 이러는데 그래서 내 생각에 내 혼차 아~ 영 원폭 탓이라 카는 거⋯ 원폭카거든 일본사람들은 요기 원폭 탓이구나⋯ 내속으로만 이러지 우리 아들이고 그런 소리 아들 듣는다고 몬카고 며느리 듣는다고 몬카고 아들 듣는다고도 몬카예. 넘한테 캐도(이하중략). 안직까지⋯ 집에서는 안⋯ 안합니더. 안 해봤어.”
“우리남편이 피부병을 얻었고 자석(자식)은 괜찮아야 될낀데 그 피가 흐르고 있으니깐 우리 아들도 그런 거는 혹시 있어요. 원폭 땜에 그렇다고 써 붙이고 하니께, 몬한다 이말이제”
김 할머니는 현재 복지관에서의 생활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한살 되서 여기 들어왔거든 들어와 가지고 올해 17년 지났는데 우리나라에서 믹여살리 이래 일본 돈하고 우리한국 돈하고 썩카가 이래 맨들었는데 이래 맹그래가지고 참⋯ 이래 느까 나이 칠십고(먹여 살리고) 여왕처럼 이래 해주고 시설도 잘 되가 있고 참 목욕 자주할 수 있고 우리 오히려 늙어가지고 지금 편하게 살고 있는 택이라⋯ 편하게 살고 있고 걱정없이 뭐, 자슥들 걱정없고 내도 내쉬고 이래하면 되는 거 오히려, 오히려, 오히려 참 자슥들 오히려 도와주지(이하중략) 요요, 오히려 요가 났는데 뭐 친구들이 많고 뭐 다 재미있게 하고 있어예⋯ 즐겁게 하고 있어예.”
김 할머니는 이와 같이 복지관에서의 생활을 여왕대접 받는다고 생각하고 아주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김 할머니의 만족감은 객관적인 정부의 지원이나 일본으로부터의 사죄적 배상이 많아서라기보다는 평생 쫓겨 다니며 살아온 세월에 비해 지금의 생활이 약간 안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김 할머니는 현재 일본에서 방문하는 소수의 양심인사들의 통역에 봉사하고 있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일본에 가면 일본사람, 한국에 가면 한국 사람이라는 표현처럼 어쩔 수 없이 환경에 따라 배운 일본어가 말년에 자부심으로 이어졌다.
“내가 내가 다 요런 건 음⋯ 내가 젊을 때 외워논끼네 안 이저뿌써 거 일본서 사람이 왔다 뭐 어데서 뭣이 왔다카믄 내가 일본말로 일본사람한테는 일본말로 하고 한국 사람한테 한국말 좀 부족해도 뭐 알아듣구로 알아들은께네 요만치라고 하고 그렇지 하이구 뭐 나만치 씨부리는 사람없어, 응 뭐 나많고 칸케네(나이많고 그러니깐) 몬한다 카고 다 이저 뿌따카고 ”
김 할머니는 복지관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일본어 통역을 한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지니고 있지만, 그 원폭후유증인 위장병은 위암으로 번졌고 노년의 삶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니까 평생 위를 조져가지고 먹는 걸 같다가 못 먹는다 아입니꺼. 한국에 와서 못 묵고 물 때 묵고 안 물 때 안 묵고 한께네 위장이 나빠져 가꼬⋯ 평생을 이때미로 이래⋯ 이래카다가⋯ 결국 내가 85에 위를 수술했어예. 위암으로 그래 수술했는데 삼분의 일 끊어냈어⋯ 삼분의 이 끊어내고⋯ 삼분의 일 부티놓고 해놨는데⋯ 요샌 고게 쪼매 자랐는가 밥을 오래 먹습니다. 뭐 묵고 묵는 거는 다 먹을 수 있는 데로 다 먹는데⋯ 이 위하고 장하고 이 인자⋯ 대변을 볼 때에 첨에 정상적으로 이⋯ 보다가⋯ 해도⋯ 난주 끄트머리 가서 설사가 나오고⋯ 이러고 나믄 별간 물이 작작작작작 나거든⋯ 그기 음⋯ 정상적으로 약 무야되제⋯ 또 정망 떠라제⋯ 정망 같은 거 먹고 막⋯ 이런 걸로 이래 재고 막⋯ 살고 있습니다.”
김 할머니는 복지관에서 여왕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위암수술 후유증으로 인해 설사병을 달고 살아가고 있다. 김 할머니의 위암 수술은 통상의 노인세대들에게 일어나는 위암수술과는 다를 것이다. 김 할머니가 원폭피해에 노출된 후 일본의 적극적인 배상과 한국정부의 개입과 지원이 있었다면 그의 표현처럼 먹을 때 먹지 못하고 안 먹어야 될 때 먹는 불규칙적이고 열악한 식이습관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김 할머니의 삶은 복지관에서의 작은 공간 그리고 일본정부가 형식적으로 내던져준 건강수첩이라는 보상으로 끝났지만 그 대가는 자신의 병이 자식에게도 유전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와 위암 그리고 설사병의 교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받은 것은 티끌 같지만 빼앗긴 것은 산더미 같은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생애사 주체의 자기실존 의미구성과 내용
김 할머니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가고 평생을 육체적 고통과 정서적 질곡(桎梏) 속에 살게 한 원폭의 의미는 무엇인가? 김 할머니는 원자폭탄을 대량살상의 무기인 동시에 인간의 악마성이 드러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 할머니의 경우, 일반인들의 관측과는 달리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책임보다는 재래식 무기로서도 충분히 일본을 점령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폭을 투하한 미국에 대한 원망과 저주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이제 오끼나와까지 와서 점령하고 있는데 그래도 손 안든다 말이지 끄랑께네 핵을 써서 더는 안 된다는 긴데 미국사람이 핵을 썼어⋯ 그런께네⋯ 전쟁 일본사람이 카거든⋯ 누가 니쁘노 카거든⋯ 첫째는 일본사람이 나쁘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사람이 나쁘다⋯ 그러나 핵 쏸 미국사람도 나쁘다⋯ 즈그는 핵을 없애라, 없애라 카믄 즈그부터 없애야 되는데⋯ 즈그는 핵 갖고 있고⋯ 다른나라는 핵이 없어야 돼⋯ 그런 식으로 해가꼬는 안 되거든예⋯ 그래서 그란다 카니⋯ 미국도 나쁘다⋯ 나쁘다⋯ 우리도 그카지마는⋯ 뭐 그래가지고 참⋯ 거서 인자.⋯ 소문이 이상한 소문이⋯ 나있는 겨⋯ 우리 한국사람 말이⋯⋯.”
미국은 핵을 투하함으로 해서 전쟁을 일찍 종식시켰고 미군들의 희생은 막았지만 김 할머니에게 있어서 미국은 살펴본 바와 같이 핵을 무기로 약소국을 억압하는 또 다른 폭력의 상징이다. 김 할머니에게 있어서 핵은 대량학살이었고 미국의 성공이었다. 김 할머니는 특히 히로시마에 핵이 떨어진 아침시간에 대해서 예리한 증언을 한다. 그리고 미국은 8월의 오전 많은 사람들이 활동을 하고 있는 시간을 이용하여 마치 커다란 가마솥에 사람을 모아놓고 볶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신체적으로 고⋯ 핵이니까⋯ 핵이⋯ 핵을 터자니까⋯ 고 당시에 아침 8시 15분 같으면⋯ 햇빛이 짱짱하제⋯ 따신데 말이지.⋯ 또 모타가⋯ 고 당시에 공장 모타를⋯ 7시 모타를 올렸거든예⋯ 전기 뺑뺑 돌아가제⋯ 참 찬스가 좋을 때 미국 그것들이 떠라 가꼬⋯ 미국 저거는⋯ 대성공을 했는기라 히로시마에⋯ 사람이 나가사키는 이틀 후에⋯ 9일 날⋯ 이틀 후에 했는데⋯ 구름이 약간 끼고 해서 나가사키는 실패했고⋯ 그캅디다⋯ (이하중략) 아침에 7시에 모타 올맀제⋯ 응? 차 전차에 이리뭐⋯ 이래 뭐⋯ 전기⋯ 전차 선 이래 하지⋯ 불이 이제 일난께네⋯ 막막⋯ 몰살⋯ 몰살 잘 시켰지 그것들이⋯ 미⋯ 미국에는 대성공을 했는기라⋯ 그 저저⋯ 참⋯⋯.”
김 할머니의 이러한 해석은 미국의 일부 양심적인 식자들의 해석과도 일맥상통한다. 트루먼 정부 때 군사수석 보좌관을 지낸 윌리암 리히와 군사전문가 핸스 볼드윈은 미국의 히로시마 핵 투하를 가장 야만스런 민족에게 그보다 더한 야만을 저지른 행위로 해석하고 있고 미국이 막대한 자금을 들여 개발한 핵폭탄을 일본을 대상으로 실험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특히 일본은 연합국의 포츠담선언 이후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핵을 사용한 것은 미국의 또 다른 야만행위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접근에 있어 한국은 물론 일본의 양심 있는 식자들조차도 일본의 잘못만을 두드러지게 제기했을 뿐 원자폭탄을 투하한 미국에 대해서는 어떠한 비난도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일본의 일차적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그보다 더한 본질적 과오를 미국의 야만행위에서 찾고 있다. 김 할머니에게 있어서 미국은 자신의 청춘은 물론 전 생애를 갈갈이 찢어놓고 짓밟은 거대한 유린(蹂躪)의 몸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단지 김 할머니의 의미구성에 의하면 깃털에 불과했다.
한국정부에 대한 김 할머니의 의미는 양가적이다. 전술한 실존생애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신에게 복지서비스를 제공하여 비록 노년이지만 일신이 의탁할 곳을 마련해준 보호와 배려의 근원이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아주 오랜기간 동안 원폭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침묵했던 한국정부를 침묵하는 권력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 할머니는 특히 원폭피해자 소송에서 자신들이 피해자의 자격이 아니라 과거 일본인으로서의 자격으로 소송을 제기한 것에 대해 자신들을 국적 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
“우리는 한국사람이 아니라 피해자도 아니고 우리도 그 당시에는 그 당시에 우리도 일본사람이었다. 그런데 와 전장에서 졌다케서 그카노, 왜 느그는 그 앞에 일본사람은 다 돈을 주고 이래 이래 수시로 빼주고 했는데⋯⋯.”
원폭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김 할머니를 비롯한 원폭피해자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과거 일본인이었다는 자격으로 원고의 지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정부는 조국근대화의 구호를 내세우며 급속한 경제발전을 했지만 단 한 번도 원폭피해자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일본의 책임회피와 한국정부의 자국민 유기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손진두 수첩재판이다. 손진두 씨는 히로시마 원폭투하 당시 폭심지로부터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피폭되었다. 손씨는 그 후, 귀국했으나 국내에서는 원폭후유증을 치료받을 수 없었고 또한 극단의 생활고 때문에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러나 그는 밀입국자로 체포되었다. 손진두 씨는 일본정부를 상대로 일본인과 동일하게 건강수첩을 발급해달라고 요구했다. 재판은 장장 7년간 이어졌고 마침내 1978년 3월 30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한국인에게도 건강수첩을 발부하라는 판결을 냈다. 원폭피해자들은 피폭을 당한 지 4반세기가 훌쩍 넘는 33년 만에 피해보상을 받을 길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은 일본의 거주하는 한국인에 국한된 것이었다. 귀국한 원폭피해자들은 개별적으로 일본에 건너가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정부와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원폭피해자들은 길고도 지루한 법정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법정투쟁에 대해서 김 할머니는 “스물세 번 만에 우리가 이겼답니다.” 라고 간략하면서도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이 스물세 번이라는 숫자에는 김 할머니를 비롯한 원폭피해자들의 한국정부에 대한 원망, 일본에 대한 저주, 삶의 고단함 등이 그대로 배여 있다고 할 것이다. 김 할머니는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김종필과 오오히라 마사요시(太平正方) 간에 합의한 대일청구권 합의에 대해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5.16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군부정권은 일본과 청구권 교섭을 벌였고 한국정부는 일본정부로부터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으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등 총 5억 달러의 자금을 받아냈다. 이 자금은 주지하다시피 포항제철 건설을 비롯한 경제개발에 투여됐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자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일제에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은 한일청구권 협상 이후 개인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이유로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김 할머니는 한국정부를 몰염치의 극치로 표현하면서 자신들에게 보상을 해야만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액수는 받은 피해에 비해 너무나 약소한 단돈 천만 원이다.
“우⋯ 우리나라 정부에 대해서⋯ 우리가⋯ 고발했거든⋯ 지금 고발핸게 있어요⋯ 우리나라 정부에⋯ 뭐 우리나라 옛날에 박정희 시대⋯ 고속도로 낼 적에⋯ 고속도로 낼 적에⋯ 그 원폭피해자들 돈을 가 와서 자기네들 썼는기라⋯ 그리고 황제절⋯ 집 저것도 또⋯ 재산 가서⋯ 가와서 썼고⋯ 그 당시에 뭐 몰랐지⋯ 원폭피해자들 전신에 무식하고 뭐도⋯ 참 알수가 있나⋯ 그래 인자 난중에 찍히고 말하는데⋯ 지금 인자⋯ 인자 그래하믄서⋯ 그 당시에 그래 하믄서⋯ 이제 우리나라 부자됐다⋯ 부자됐으면 우리도 좀⋯ 돈 천만 원쓱 도라⋯ 이래카믄서 고발 지금 해놨는데⋯ 1차에 졌는데⋯ 2차에 또⋯ 저 한다카믄서 돈 십만 원쓱 또 거돠 갔는데⋯ 1차에 12만원⋯ 2차에⋯ 7만원⋯ 그래가지고 지금⋯ 고발을 또⋯ 또 더 하고 있어예⋯⋯.”
김 할머니는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 있어서 청구 또는 소송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유독 고발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는 김 할머니의 법률용어에 대한 무지라기보다는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 단순한 자신들의 피해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한국정부의 직무유기에 대한 질책과 비난, 원망이 포함된 김 할머니만의 독특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은 원폭피해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국가로서의 직무유기에 대한 배상이다.5)
김 할머니는 히로시마에서 원폭피해를 당했다. 히로시마는 저주의 땅이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망각의 땅이지만 일본사람들에게는 우호적 감정을 지니고 있다. 김 할머니가 히로시마로 가기 전 태어나고 성장한 일본의 교토(京都)는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수도를 도쿄(東京)으로 옮기기 전 천 년 이상 일본의 수도였던 도시이다. 때문에 자긍심이 넘쳐나고 지방색이 분명하다. 교토에서는 3대 이상 거주하지 않으면 토박이로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인마저 배척당하는 땅에서 가난한 한국인이 차별받았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히로시마에서의 생활, 소학교 졸업 후 고무공장 공원, 버스회사 승무원으로 일할 때는 물론 원폭투하 후에도 일본인에 대해서 악감정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김 할머니가 한국행을 선택할 당시 일본인들은 할머니를 만류하며 부족하지만 자신들과 같이 살자고 권유한 친절한 사람들로만 기억한다.
“ 음 같이 살자꼬 같이 살면 될낀데⋯ 뭐 할라꼬 갈라고 하노. 이렇게 말리는 사람도 있었고⋯조센징 카는 소리, 그런 소리 안 해예⋯ (이하중략) 일본사람 좋습니더⋯ 일본사람 좋고⋯⋯.”
이러한 일본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일본을 강하고 정직한 나라로 기억하고 있다.
“사람이 좋아예⋯ 일본사람은⋯ 어⋯ 즈그 말마따라 강한 나라⋯ 전쟁에 안지는 나라⋯ 정직⋯ 정직하고⋯ 그래 내가 일본사람⋯ 선생 때 이러고⋯ 우리는 배알 때 그래 배았다.⋯ 배알 때 강한 나라.⋯ 전쟁 안지는 나라⋯ 예⋯ 인자 이래 배았는데⋯ 정⋯ 정⋯ 정직한 사람⋯ 이래 배았는데⋯⋯.”
일본인들에 대한 이러한 의미구성은 개인과 국가를 명백히 분리해서 접근하는 합리적 사고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식민지교육의 잔재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교육의 잔재는 김 할머니와 같이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하에서 권력과 부를 누렸던 당사자들과 그 후손에 국한된다고 할 것이다. 김 할머니는 또한 어휘에도 일본식 표현이 남아 있고 특히 시간을 구술함에 있어 서기(西紀)와 소하(昭和)6)를 혼용해서 구술하고 있다.
“이래가꼬⋯ 그래 인자⋯ 소하 16년도 봄에 졸업을 해가지고⋯ 소화 17년도 인자⋯ 2월 달인가 3월 달인가 모르겠다⋯⋯.”
“요요⋯ 저저저⋯ 지방장관7)들 다 모이고⋯ 뭐 군수니 뭐 저저저⋯ 교황도 올 때가 있고⋯ 지방장관들 모이고 이래가지고⋯ 제사 지내고⋯ 거 제사 지내고⋯ ”
일본에 대한 기억과 의미구상은 살펴본 바와 같이 최소한의 적대감이나 서운함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이는 김 할머니의 일본에 대한 친밀감이나 무지가 아니라 한국 땅에서 받은 설움과 좁게는 가까운 친척 그리고 넓게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은 배척과 무관심이라고 사료된다. 이러한 해석은 친척에 대한 김 할머니의 기억과 의미구성에서도 잘 나타난다. 김 할머니는 어머니의 고향이자 남편의 고향인 합천에 정착했다. 하지만 고향민들은 귀향한 그들을 환영하지 않았고 부유한 친척마저도 조금의 도움도 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자신들에게 잘못이 있음을 인정하고 최소한의 보상이라도 해주었지만, 한국정부는 원폭피해자들을 귀찮은 존재로만 여기고 어떠한 배려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정부가 원폭피해자에게 지원하는 유일한 원폭피해자 복지기금은 일본이 출연한 것이다. 1990년 노태우정권은 일본총리와 정상회담에서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위해 두 나라에서 각각 40억 엔씩 갹출하기로 합의했다. 일본은 1991년엔 17억 엔, 1993년에는 23억 엔을 냈다. 그들은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한국은 자국민의 복지가 걸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소액의 기금을 출현하고 있다. 한국정부의 지원은 1992년 1억6백만 원을 시작으로 1996년까지 매년 2억 원을 넘지 않았다. 당시 노태우정권은 북방정책을 추진하면서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지만 원폭피해자들을 이렇듯 철저히 무시했다. 이러한 점은 김 할머니는 물론 모든 원폭피해자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고 이로 인해 자신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는 인식을 하게 만들었다. 일부 원폭피해자 1세들은 자신들이 “일본인이었으면 이렇게까지 홀대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김 할머니 역시 예외는 아니다. 국가는 그저 그림자였을 뿐이다.
“일본은 돈 내커든요. 한국도 돈낸다고 캤는데 일본은 몬카 다 냈는데 한국은 병아리새끼 오줌 누듯키 찔금찔금 내고 돈은 다 이상한데 써뿌리고 지금 해주는 건 이 회관도 한국돈하고 일본 돈하고 썩카서 만든 거고 천만 원 돌라캐도 그것도 안주고 목숨 팔아카고 돈 많이 받아쓰면서 한 푼도 안 땡겨 주고⋯⋯.”
김 할머니는 투쟁 끝에 원폭피해자 수첩을 받았다. 원폭수첩을 소지하고 일본에 가면은 무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일 년에 270만원의 의료비를 쓸 수 있다.
“이 수첩이 있으면 이 우리한국에서는 많이 안 쓰이⋯ 일본 가가면 병원에 가면 무조건 공짜배기라. 다 공짜라⋯ 수술해도 공짜배기. 입원비고 머시고 다 공짜배기⋯ 여기서는 일본사람이 일 년에 얼마쓱 자기가 준다 아입니꺼. 일 년에 270만 원⋯⋯.”
일본정부가 발행한 원폭피해자 수첩은 김 할머니를 비롯한 원폭피해자 1세대들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재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원폭피해자협회에 가입을 하지 않았다. 피해에 비해서는 부족하지만 혜택이 있는 원폭피해자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혜택을 받지 못하고 음지에 살고 있어도 자녀들을 원폭피해자 2세라는 또 다른 낙인의 리스트에 올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김 할머니에게 있어서 원폭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량살상이고 미국의 승리이지만 자신으로 인하여 아들에게까지 이어질 수 있는 원죄였다.
“사는데⋯ 우리 원포겡 가입 안했습니다. 처음에⋯ 원폭이 이기⋯ 원폭 가입에⋯ 이게⋯ 구상 안한지가 오래됐거든예⋯ 지금 70년이 됐는데.⋯ 그 당시에 한 요. 60년 전에는 고⋯ 이거 이거⋯ 원폭사무실 맹글고 자기들 딴에는 구상한다고 이래샀는데⋯ 우리 남편이 절대로 가입하지 말라⋯ 이카는 기라⋯(이하중략) 결혼을 갔다가⋯ 응⋯ 맘대로 몬 시킨다⋯ 몬 시킨다⋯ 이 그걸 갖다가⋯ 인자⋯ 원폭 싫어하는 기라⋯ 그런데 그런게 있기 때문에 절대로 가입을 몬하구로 하는기라⋯ 고런⋯ 남편 돌아가고 우리⋯ 아들 결혼 다 시키고 나서 한 늦가서 내 가입했어요.”
살펴본 바와 같이 원폭수첩은 혜택보다는 사회적 낙인이었고 자식의 혼삿길마저 막을 수 있는 멸문의 상징이었다. 김 할머니는 아들을 결혼시킨 후, 피해자협회에 가입했고 원폭수첩을 교부받았다. 하지만 원폭수첩은 일본정부가 자의적으로 발급한 것이 아니다. 원폭수첩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일본에 가야하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일본은 원폭피해자에 대한 처리를 국가 대 국가의 차원이 아닌 국가와 개인차원으로 한국정부가 침묵하고 있는 사이 국가와 개인의 관계로 바꿔버렸다. 때문에 김 할머니는 자신이 과거 일본인이었음을 내세웠고 보증인을 세워야 했으며 개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지루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개인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하여 복잡한 행정절차를 거치기에는 너무나 많은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김 할머니는 이 과정을 홀로 치러냈고 결국은 원폭피해자 수첩을 발급받았다. 결국 김 할머니에게 있어서 수첩은 일본이라는 거대한 거인과 홀로 싸워 얻은 전리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Ⅴ. 논의 및 결론
본 연구는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노출되어 평생 응어리진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한 여성노인의 이야기이다. 연구자는 여성노인의 회상을 통해 우리사회의 잊혀진 기억을 다시 불러 일깨우고자 했다. 한 개인의 회상은 주관적이며 사회와는 무관한 개인적 기억이 아니다. 회상은 사회적 구조와 상황에 의해 재구성되는 그 사회의 구체적 일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기억과 회상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적이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기억은 사회의 관점에서 기억하고 회상하기 때문에 사회의 기억은 개인의 기억 속에서 구체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보면 생애사 주체의 회상은 우리사회의 사회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결과를 통해 생애사 주체인 김 할머니가 겪은 원폭피해의 실상과 그 이후 겪은 일들이 그녀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어떻게 의미화되었는지 논의해보고자 한다. 첫째, 생애사 주체에게 원폭의 의미는 그 자체로 대량살상의 무기인 동시에 잔혹한 인간의 악마성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특히 강한 나라로만 여겼던 일본조차 무참히 전멸시킬 수 있는 미국은 그녀에게 원망과 저주의 대상이자 약소국을 억압하는 또 다른 폭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막대한 자금으로 개발한 핵폭탄을 투하함으로써 대량학살을 방치했고 선량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은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었기에 그 과오를 미국의 야만적 행위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원폭은 김 할머니의 청춘과 전 생애를 짓밟은 거대한 유린의 몸통으로 의미구성되었다. 둘째, 원폭은 국적조차 없는 존재로 방치시킨 김 할머니와 같은 원폭피해자들을 거대권력에 맞서 투쟁하는 투사로 만들었다. 원폭피해자 소송을 통해 일본과 한국정부에 배상의 책임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피해자 자격이 아닌 일본인 자격을 요구하였고, 한국정부는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이유로 원폭피해자들의 호소를 외면해버렸다. 자국조차 외면해버린 원폭피해자들은 길고도 지루한 법적투쟁을 벌어야 했고 그 시간 속에는 김 할머니의 투쟁의 삶도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스물세 번 만에 승소했지만, 한일국교 정상화라는 또 다른 역사적 사건 앞에 좌절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김 할머니는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포기하지 않았고 원폭피해자가 겪는 고통과 시련을 세상에 고발하며 한국정부의 직무유기에 대해 배상의 책임을 요구하는 활동에 동참하였다. 셋째, 생애사 주체인 김 할머니는 히로시마를 저주의 땅이자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망각의 땅으로 여겼지만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일본과 일본사람들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감정을 지녔고 평가도 긍정적인 편이었다. 그녀에게 일본은 출생지인 동시에 유년기의 성장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인간은 태어나 자란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존재라는 점에서 적어도 원폭피해 이전에 일본과 일본사람은 그녀의 성정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분명 한국인으로서 적잖은 차별을 받았음에도 원폭이라는 비극적 사건 이후 그녀와 그녀의 가족에게 닥친 고통과 시련에 비하면 일본에서의 삶은 최소한 기억에 담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즉 김 할머니가 살아온 삶의 궤적 가운데 그녀를 가장 빛나게 했던 시간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의미구성하는 것이다. 넷째, 김 할머니가 기나긴 투쟁 끝에 일본정부로부터 받아낸 원폭수첩은 자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혜택인 동시에 사회적 낙인으로 의미화되었다. 원폭수첩을 통해 1세대들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수첩은 자식의 혼삿길마저 막을 수 있는 멸문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김 할머니에게 원폭은 대량살상이고 거대한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자신으로 인하여 자식들에게까지 어이질 수 있는 원죄로 의미부여하였다. 비록 자신이 혜택을 받지 못하더라도 자식들만큼은 원폭피해자 2세라는 딱지를 갖지 않도록 모두 출가시킨 후에야 피해자협회에 가입하였고 원폭수첩을 교부받은 것이다.
생애사 주체의 구술생애를 통해 연구자는 한 개인의 실존적 정체성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조건으로써 그 사회에 존재하는 책임의 사각지대를 발견했다. 이러한 사각지대는 특히 취약집단에 대한 지배집단의 묵시적 방관자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한국의 사회복지제도는 원폭피해 희생자들에게 가해진 정치적 폭력의 흔적들을 추적하여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그 기원을 외면하고 현재의 문제에만 집착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사회복지가 이렇듯 표면적 대응에만 전도된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복지실천에 있어 필요한 재원을 대부분 국가와 지자체에 의존하여 해결하려고 하는 관행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과거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집단적 묵인에 공모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현대사는 성장과 번영의 역사이지만 그 이면에는 김 할머니와 같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저당 잡히고 평생을 그늘 속에 살아온 무수한 사람들의 희생이 있다. 이제 잊혀진 그들의 기억을 복원해야만 한다. 기억의 복원은 우리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그 기억을 자기의 기억처럼 간직해야만 완성된다고 할 것이다. 개발과 발전의 논리에 희생의 이야기가 묻힐 수가 없다. 김 할머니와 같은 많은 이들에게 사회복지서비스는 국가와 사회가 자행한 폭력과 잘못에 대한 합당한 배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김 할머니는 국가에 대해 원망과 분노를 표출하면서도 국가가 제공하는 주거서비스와 생계서비스에 만족하고 있다. 원폭피해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희생자로서의 사회적 권리를 되찾을 수 있는 사회복지정책을 제도적으로 구축할 필요가 있다. 또한 1세대 원폭피해자들뿐 아니라 그 피해가족들에 대한 실태조사와 국가, 지자체 차원의 사회복지 지원체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연구는 원폭 1세대 여성의 원폭피해와 생애경험을 다루고 있어 1세대 남성과 그들의 가족 및 2, 3세대로 이어진 상처의 경험을 담는데 한계를 가진다. 특히 1세대 피폭자들의 자녀세대가 앓고 있는 각종 후유증 및 장애, 경제적 어려움 등에 대한 실태조사를 비롯한 다양한 후속연구가 조속히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References
- 권혁태(2009). “히로시마/나가사키의 기억과 유일피폭국의 언설”,『일본비평』I: 60~89.
- 김광열(2010). 『한인의 일본이주사 연구: 1910~1940년대』, 논형.
- 김승은(2012). “재한 원폭피해자 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의 인식과 교섭태도(1965~1980),” 『아세아연구』, 55(2): 104~135.
- 김정경(1993). 『한국 원폭피해자 복지대책에 관한 연구』, 중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박경섭(2009). “조선인원폭피해자와 초국적 시민(권)”, 『현대사회과학연구』, 13:153~166.
- 박성희(2002). “여성학 연구를 위한 생애사 연구법 : 네러티브 인터뷰”, 『여성연구논총』, 17.
- 백옥숙(2004). 『한국원폭피해자의 특성과 지원현황에 관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송건용(1991). 『원폭피해자실태조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 이치바 준코(2003). 『한국의 히로시마』, 서울: 역사비평사.
- 일본 내무성(1945). 『원폭피해자 실태조사자료』, 일본내부성 경보국.
- 오은정(2013). 『한국 원폭피해자의 일본 히바쿠샤 되기: 피폭자 범주의 경계설정과 통제에서 과학·정치·관료제의 상호작용』,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이상화(1995). “재한원폭피해자의 생활과 남아 있는 보상문제”, 『근현대사강좌』7: 192~210.
- 이지영(2012). “한인 원폭피해자 문제 관련 연구와 자료현황”,『일본공간』, 12: 229~246.
- 이희영(2005). “사회학 방법론으로서의 생애사 재구성”, 『한국사회학』, 39(3): 120~148.
- 임경택(2012). “근대 일본의 국적제도와 일본인의 설정: 혈통주의와 단일민족론에 근거한 변용과정”, 『한국문화인류학』, 45(2): 3~36.
- 진 주(2004). 『원폭피해자 증언의 사회적 구성과 내용분석』, 전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 정근식(2005). 『고통의 역사: 원폭의 기억과 증언』, 선인.
- 한국교회여성연합회(1984). 『한국인 원폭피해자 실태조사보고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 한국원폭피해자협회(2013). 『한국 원폭피해자 내부자료』, 한국원폭피해자협회.
- 한경혜(2005). “생애사 연구를 통한 노년기 삶의 이해”, 『한국노년학』, 24(4): 87~106.
- Levi, P.(1989). 『The Drowned and the Saved』, trans, R. Rosenthal, New York: Random House.
- Miles, M.B & Huberman, A.M.(1994). 『Qualitative Data Analysis: A source book of new methods』, Thousand Oaks. Sage.
- Rosenthal, G.(2008). 『Interpretative socialforschung』, Eine Einfuhrung. Weinheim München, Juventa-Verl.
- Yoneyama, Lisa.(1999). 『Hiroshima Traces: Time, Space and the Dialectics of Memory』, Be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https://doi.org/10.1525/california/9780520085862.001.0001]
20011년 성균관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기복지재단 정책연구실 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최근 연구분야는 서민금융, 청장년 자산형성, 장애인 자립지원, 4차 산업혁명과 스마트 돌봄서비스 등이다. 발표논문은 “Correlates of Adolescent Cyberbullying in South Korea in Multiple Contexts: A Review of the Literature and Implications for Research and School Practice”(2017), “Understanding internet gaming addiction among South Korean adolescents through photovoice”(2018), “찾아가는 복지 대상자 관점에 기반한 질적 성과평가 및 개선방안 도출 연구”(2018) 등 다수 논문이 있다.